치유하는 우붓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LEE HYUNJIN
  • SUPPORTED BY UBUD TRIP(ubudtrip.net), THE ROYAL PITA MAHA (royalpitamaha-bali.com)

치유하는 우붓

A Journey of Rejuvenation

우붓에서 소란과 완벽하게 단절된 곳에서 머물며 신심 깊은 우붓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간 발리 여행에서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꿈, ‘쉬고 비우고 채우기’를 마침내 손에 쥐고 돌아왔다.
  • written by ryu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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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4일
우붓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조각 예술. 신화, 신, 역사, 풍습 등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당신을 이끄는 건 영혼(soul)인가요, 마음(mind)인가요?” 우붓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영을 좇고 싶지만 마음에 지배되죠. 수도자도 아닌데 어떻게 영에 더 가까워질 수 있나요? 그게 가능하긴 해요?”
대낮부터 다짜고짜 이런 말을 건넨 그는 주술사도, 발리에서 오래 수행한 히피도, 요가 반(The Yoga Barn)의 명상 선생님도 아닌 그냥 우붓 사람이다. 우붓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 없는 남자, 삭티 가든 리조트의 매니저 구스덱이 전 세계의 번뇌자들에게 발리라는 환상을 심어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오는 주술사 ‘케투’같은 얼굴로 나를 다독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영혼이 나를 이끌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죠. 그래서 이마와 목에 이걸 붙인 후 보고 느낄 때마다 상기합니다. 내 영혼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요.”
그의 미간에서 말갛고 투명하게 빛나는 그 쌀을 발리 사람들은 비자(Bija) 혹은 홀리 라이스(holy rice)라고 부른다. 성수나 백단향을 푼 물로 씻은, 온전한 모양을 갖춘 이 쌀알은 시바 신의 아들인 쿠마라를 상징하며, ‘신성의 씨앗’을 의미한다. 발리 사람들은 매일 아침 기도를 마친 후 몸에 이것을 붙이는데 두 눈썹 사이에 붙일 땐 지혜의 빛을, 목 아래 붙일 땐 행복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신에게 간구한다. “발리 사람들에게 비자는 신과 통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신과 함께 있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영의 목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죠.”
‘제발 나한테도 그 쌀 몇 톨만 좀 달라’는 신소리를 하는 대신 다른 결심을 했다. 우붓에 있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영혼에 집중해보자. 서울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포악하고 예민한 도시인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모든 순간을 놔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모두가 내면의 평화를 좇아 허겁지겁 찾아오는 땅, 번뇌자들의 이데아 우붓에서 그런 마음으로 보낸 며칠의 시간.

치유의 캠프

지난해, 번아웃을 극복해보고자 2주간 발리에 머물렀다. 근 10년 만에 다시 찾은 우붓의 중심가, 잘란 라야 우붓(Jl. Raya Ubud)에서 처음 마주한 장면은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비좁은 일차선로. 줄지어 선 자동차와 바이크가 합심해 만든 자욱한 매연과 소란 틈에서 “거기 어때?” 하고 묻는 친구의 메시지에 이렇게 답했다. “<Eat, Pray, Love>랑 요가 반이 우붓을 다 망쳐놨어.”
우붓에 더 이상 여유, 고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나의 단정을 유보한 건 로열 피타 마하(The Royal Pita Maha) 때문이다. 우붓 왕궁, 푸리 사렌 아궁(Puri Saren Agung)에서 5.7km만 내달리면 닿는 이 리조트에서 나는 발리에 지금도 왕이 산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붓의 마지막 통치 군주 조코르다 그데 아궁 수카와티(Tjokorda Gde Agung Sukawati)의 아들 조코르다 그데 푸트라 수카와티(Tjokorda Gde Putra Sukawati, 이하 푸트라 수카와티) 얘기다. 왕정은 끝났지만 왕국은 살아 있다. 로열 피타 마하가 근거다. “이곳은 원래 왕실의 저택이었습니다. 지금의 리조트가 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우붓인들의 일자리를 위해,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죠.” 로열 피타 마하의 총괄 매니저 데와 아림바와(Dewa Arimbawa)의 말이다. 우붓에서 수카와티 왕가가 운영하는 리조트는 총 세 곳. 1천5백여 명의 우붓인이 피타 마하 그룹에 속해 일과 삶을 꾸려간다.

데와에게 ‘수카와티 왕실의 지역사회 공헌’ 얘길 듣다가 왕실의 공간을 외지인에게 연 까닭을 못 들었지만, 머물면서 직접 찾기로 한다. 첫날엔 정글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독채 풀빌라, 지역의 장인과 예술가의 작품으로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방, 원시의 숲을 방불케 하는 정원, 텃밭에서 직접 재배하는 식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의 화려한 면면에 마음을 뺏겼다. ‘예술로 우붓을 일으킨 왕조’로 유명한 수카와티 가문의 취향을 고스란히 품은 공간은 확실히 매혹적이었지만 한편으론 의문이 일었다. 그걸 보여주고 과시하는 것이 푸트라 수카와티의 의도였을까?
그가 베풀고자 한 것은 우붓의 흥성기를 고스란히 품은 럭셔리 빌라에서 보내는 윤택한 며칠이 아니다. 그런 곳은 신혼여행객을 겨냥하는 최고급 숙소의 각축장인 발리에 이미 차고 넘친다. 내가 로열 피타 마하에서 경험한 건 20세기 전, 순전한 우붓 그 자체다. 이곳이 ‘약(medicine)’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의 발원지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들은 후 추측은 확신이 됐다. 로열 피타 마하가 자리한, 승천하는 용의 몸짓처럼 힘차게 굽이치는 아융강(Ayung River)이 품은 산기슭은 이 땅에 우붓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자, 르시 마르칸데야(Rsi Markandeya)의 모험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그 역사의 ‘기승전’을 이곳에 풀려면 사흘이 모자라므로 ‘결’만 간략히 요약하겠다. 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발리로 온 성자가 고행 끝에 찾은 안식처가 바로 아융강 일대. 그가 발견한 치유의 식물과 성수가 샘솟는 이 부지는 자연스럽게 우붓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터를 차지할 권력을 가진 왕의 집이 됐다. 그 ‘기운’은 떠나는 날까지 길을 잃고 헤맬 만큼 드넓은 리조트 부지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레 경험할 수 있다. 빌라들이 포진한 산기슭의 중간, ‘홀리 워터(holy water)’를 이름으로 내건 수영장의 물은 우붓 사람들이 정화 의식을 할 때 찾는 진짜 약수다. 수영장 안쪽 깊숙이 자리한 사원, 365일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단 위 차낭사리, ‘생리 중인 여성은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쓰인 표지판들이 이곳이 진짜임을 입증한다. 로열 피타 마하가 보여주는 우붓다움의 백미는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환대에 있다. 제너럴 매니저부터 텃밭 농부까지 머물며 마주친 모든 이가 내게 보낸 꾸밈없는 친절이 인상 깊어 바쁜 데와를 붙잡고 이유를 물었다. “이곳 직원들에게 여긴 그저 돈만 받으면 그만인 직장이 아니에요. 왕이 자신에게 선물한 삶의 터전이죠. 그래서 자기 집에 온 손님처럼 진심을 다해 대할 수 있는 거예요. 또 우붓 사람들은 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면 그 에너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어요. 내가 오늘 만난 이를 축복하면 신도 나를 축복한다는 것도. 그런 진심들이 당신에게 닿았나 봐요.” 래프팅 보트를 실어나르는 아융강의 힘 넘치는 기세, 우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농도 짙은 흙·풀·꽃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왕의 정자에 앉아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본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다섯 번은 더 온 발리에서 이 섬에 사는 사람들과 이토록 자주, 깊게 만나 통한 적이 있었나? 내게 쉼을 느끼게 해준 건 요가도, 스파도 아닌 사람이었다. 우붓에서 태어나 우붓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 매일 하루 세 번, 이 세계와 타인의 평화를 비는 기도를 하는 일이 곧 삶인 사람들 말이다.

영혼을 씻는 시간

“내면의 평안을 찾고 싶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붓을 떠올립니다. 저는 항상 궁금했어요. 우붓에 대체 뭐가 있길래? 왜, 언제부터 우붓이 치유와 정화의 땅이 됐을까?”
왕궁에서 만난 남자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우붓 왕, 아궁 수카와티의 아들 푸트라 수카와티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기념사진이나 찍는 유적인 줄 알았던 우붓 왕궁이 진짜 왕이 사는 집이며 내가 그 집의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에 떨리는 마음을 꽁꽁 숨긴 채. 통역의 말을 들은 푸트라의 맑고 깊은 눈이 반짝 빛난다. “글쎄요. 그 ‘무엇’을 어떤 단어로 묘사하긴 힘들 것 같아요. 나 역시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명사를 찾으려고 했었죠. 만질 수도, 볼 수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없지만 느낄 순 있어요.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오라, 주파수 같은 것 말이에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것에 깊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면 그걸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뿜는 기운이 바로 지금의 우붓을 만든 것 아닐까요?”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아, 뭔 말인지 알 것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게 설명하려면 횡설수설할 게 분명한 알쏭달쏭한 답의 진의를 푸라 티르타 엠풀(Pura Tirta Empul)에서 찾았다. 홀리 워터 템플(Holy Water Temple)로도 불리는 이 사원은 성수를 근간으로 하는 발리식 힌두교, 아가마 티르타(Agama Tirta)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성지다. 매표소를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짙푸른 녹색 사롱 위에 붉은 띠를 둘러매는 예식용 옷(이라고 하기엔 보자기에 가까운)을 입고 제단에 차낭사리를 바치는 관광객 무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생전 기도란 것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온몸을 타투와 피어싱으로 치장한 이, 인스타그램을 위해 젊음과 재산과 시간을 다 바칠 것 같은 이들도 가부좌를 틀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기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지나 중앙에 자리한 안뜰로 가면 성수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풀, 자바 텐가(Jaba Tenga)가 나타난다. 그곳은 더 기묘했는데, 녹색 사롱을 입은 수백 명의 외국인이 물줄기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분수 앞에서 물을 받아 마신 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기심과 충격으로 뒤엉킨 내 얼굴을 본 가이드가 건넨 설명은 다음과 같다. “푸라 티르타 엠풀에서 행하는 이 의식의 이름은 멜루캇(Melukat)입니다. 몸과 마음, 영혼의 불순물을 깨끗이 씻어내는 예배죠. 예배자가 성수가 흘러나오는 분수구 앞에서 할 일은 네 단계로 나뉘는데요. 처음엔 두 손을 모아 원하는 것을 기도하고, 그 후엔 분수의 물을 한 모금씩 세 번 마신 후 얼굴을 세 번 씻어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수 아래에 머리를 씻으면 끝나는데요. 분수 중엔 장례식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에 안내자의 인도를 잘 따라야 해요.”

그 의식을 갓 마치고 나온 이들 중 천년 묵은 때를 벗겨낸 듯 개운한 얼굴을 한 남녀에게 다가가 기분을 물었다. “글쎄요. 우린 사실 특정 신을 믿는 신자는 아니지만 뭔가 특별한 계시를 받은 느낌이에요. 우주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원하는 게 앞으로 다 이뤄질 것 같은 믿음이 생겼어요.” 둘의 해사한 미소 뒤로 또 다른 희망찬 얼굴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관광객 무리 중 사원을 수호하는 물의 신, 비슈누를 믿는 힌두교도가 있긴 할까? 수도국의 수질 안전성 판정 안내장이 없어도 ‘성스럽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에 마음을 맡긴 채 몸 안팎을 적시는 이들을 보며 푸트라 수카와티에게 물었던 질문의 답을 찾았다. 자신이 믿는 것, 믿고 싶은 것을 굳게 믿으려는 마음이 모여 만드는 오라. 그게 바로 우붓을 덮은 치유의 기운이었다.

몸의 기운을 돋우는 법

쉬고 비우며 원기를 채운 덕에 마침내, 바깥으로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북적이는 시내 말고 조용하게 걸을만한 곳 없을까요?” 리조트 직원의 입에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온 이름. 참푸한 리지 워크(Campuhan Ridge Walk). 약 2km 길이의 이 산책로는 우붓 사람들이 가볍게 운동하고 싶을 때 즐겨 찾는 곳. 영문 가이드북에선 트레일로 소개하지만 대부분은 평지에 포장로로 이뤄져 발목을 보호하는 등산화, 스틱, 드라이핏 티셔츠 같은 건 필요 없다. 모자, 선글라스, 물, 모기기피제(발리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들 말이다)만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황금빛 햇볕이 이마와 등을 따갑게 쪼아대는 들판 위 골든 스폿(golden spot)을 묵묵히 지나면 축축한 풀과 나무가 우거진 그늘 숲이 나타난다. 더 걷고 싶은 사람에겐 더 걸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여정을 끝내는 종착지에서 걸음을 멈췄다. 에어컨 바람과 얼음물, 차가운 수건이 기다리는 차로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산책길을 안내한 데와가 옷깃을 잡는다. 그의 뒤를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니 싯누런 흙탕물이 넘실대는 계곡이 나타난다. “여긴 우붓에서 가장 신령한 기운을 가진 장소예요. 오른쪽 강 워스 텐겐(Wos Tengen)과 왼쪽 강 워스 키와(Wos Kiwa)가 합류해 하나의 강물을 이루는 곳이거든요. 음과 양이 만나는 곳이죠. 우붓 사람들은 간절하게 원하는 것, 혹은 치유받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곳, 구눙 레바(Gunung Lebah)에 와서 치성을 드립니다.”

역사와 종교에 해박한 나의 우붓 구루, 데와와 함께한 덕분에 여정 내내 그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오직 우붓 사람들만 구전으로 간직한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렸다. 물론 그런 것을 몰라도 우붓 곳곳의 자연을 누비다 보면 숨통이 트이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기분, 이곳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기운’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거대한 바위가 첩첩이 쌓여 만들어진 절벽을 이불처럼 뒤덮으며 강하하는 물줄기가 눈을 사로잡는 칸토 람포 폭포(Kanto Lampo Falls)에서도 그랬다. 별다른 정보 없이 지명만 들고 찾은 이들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지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풍경에 눈을 질끈 감지만, 그 장면을 뒤로하고 아래쪽으로 난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비옥한 화산토, 차고 넘치는 물과 햇빛, 깨끗한 산소를 마음껏 취하고 자란 열대식물들, 고요한 절벽,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과 마른 바위에 걸터앉아 따뜻한 볕을 쬐는 사람들이 차례로 시선에 든다. 그늘과 햇빛이 적당하게 데운 바위에 앉아 그 좋은 기운, 더없이 평화로운 순간을 한참 동안 누렸다. 발리인들이 사랑하는 물의 여신, 자애로운 데위 다누(Dewi Danu)가 내린 은총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