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런던, 고전과 현대 그 사이
런던의 음악, 패션, 아트, 거리. 런던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날씨만 빼고’.(런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대다수가 런던의 지독하게 우울한 날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런던을 좋아하는 이유 중 딱 한 가지를 굳이 꼽는다면 대부분의 미술관이 공짜라는 것. 파운드의 후덜덜한 환율에 몸을 사리다가도 입장권 하나에 몇만원씩 지불해야 하는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다르게 런던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 미술관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러니 런던에 간다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미술관에 가야 한다. 런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은 예나 지금이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V&A’란 애칭으로 불린다)이다. 아무리 힙하고 트렌디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고 해도 V&A를 향한 내 애정은 굳건하다. 무늬 중독자인 나는 세계 최대 장식 미술관인 V&A 벽 한 귀퉁이의 벽지(그토록 화려하고 섬세한) 무늬만 보아도 심장이 쿵쿵 뛰니까. V&A를 둘러보려면 하루를 통으로 잡아도 모자란데, 이번 런던 일정에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숙소가 위치한 메릴본(Marylebone)에서 가까운 미술관 중 어디로 갈지 고민하자 런던에 살고 있는 후배는 월리스 컬렉션을 추천했다. “V&A를 좋아하는 선배라면 반드시 좋아할 거예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로코코 시대의 화려함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은 하트퍼드(Hertford) 가문이 4대에 걸쳐 수집한 약 5천500점의 예술작품으로 구성된 미술관이다. 하트퍼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로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에서 결혼을 통해 부를 키워가며 예술작품을 수집했다. 후작 4세의 사생아 리처드 월리스(Sir Richard Wallace, 1818~1890)는 19세기의 대표적인 컬렉터였다. 리처드 월리스가 사망한 이후 1897년, 그의 부인이 국가에 전시품을 기증하면서 월리스 컬렉션은 1900년에 하트퍼드 하우스에서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3층 규모의 저택인 월리스 컬렉션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갈 땐 영국 귀족의 대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설레었다. 레드 카펫이 깔린 계단, 황금 조각상으로 장식된 난간,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작품 감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총 25개의 갤러리에서는 각기 다른 컬렉션이 펼쳐진다.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장 앙투안 바토, 18세기 프랑스 귀족 문화를 화폭에 옮긴 프랑수아 부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프란스 할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렘브란트, 스페인 궁정 화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벨라스케스까지, 거장의 작품들은 월리스 컬렉션의 명성을 뒷받침한다. 컬러풀한 벽지로 장식된 방을 채운 아름다운 포슬린과 로코코 시대의 가구를 구경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후작 4세는 회화나 도자기뿐 아니라 가구와 무기, 갑옷류도 구매했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병기와 갑옷이 포함돼 있는데 특히 기능성과 장식성에 예술성까지 갖춘 갑옷 컬렉션이 눈길을 모은다. 미술관 중정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겨도 좋겠다.
진화하는 디자인을 만나다
©GGARDNER PHOTO COURTESY OF THE DESIGN MUSEUM
유럽 여행 중 미술관을 갈 땐 르네상스부터 19세기까지 화려한 유럽 예술사를 둘러볼 수 있는 대형 미술관 외에도 현대미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을 한 곳 정도 끼워넣는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London Design Museum)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디자인의 현재를 목도할 수 있는 곳. 현대 영국 디자인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는 테렌스 콘랜 경이 1989년에 설립한 미술관은 템스 강변에 자리했다가 2016년 지금의 위치인 홀랜드 파크역으로 확장 이전했다. 세계적 건축회사 OMA가 설계한 쌍곡 포물면 모양의 지붕이 웅장하면서도 심플한 멋을 풍긴다. 건물 내부의 중정처럼 뻥 뚫린 공간에 자리한 계단은 광장의 역할을 한다. 삼삼오오 계단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이 활기를 더했다. 디자인의 변천사를 전시한 상설전은 무료로 볼 수 있으며 건축, 패션, 가구, 제품 및 그래픽 분야를 망라한다.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친숙한 물건들에서 기발함과 아이디어를 엿보기에 좋다. 또한 런던 디자인 뮤지엄은 디자인 오브제를 전시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디자인적 태도’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관람객이 고민하게 만든다. 전시장 곳곳에 ‘좋은 디자인은 무엇인지’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묻는 배너가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역할을 환기시킨다. 특별전으로 «팀 버튼의 세계»와 «바비 디자인의 진화»가 열리고 있었다. 팀 버튼 전시는 동시대 가장 창의적인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팀 버튼의 세계관을 집약한 전시로, 2025년 4월까지 열린다. 무려 6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이 전시를 두고 팀 버튼은 “마치 이상하고 아름다운 놀이공원 같은 곳을 걷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팀 버튼의 어린 시절 그림부터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의상과 소품까지 팀 버튼의 흥미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 독특한 디자인 제품과 굿즈를 만날 수 있는 기념품 숍도 둘러볼 만하다.
옥스퍼드셔로 쇼핑하러 간다고?
언젠가부터 도시를 여행하면 하루 정도는 근교를 둘러보는 게 패턴처럼 되었다. 런던 여행을 기획할 때 근교 여행지로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옥스퍼드. 25년 전 처음 영국 여행을 왔을 때 찾았던 기억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 후,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옥스퍼드는 해리 포터 실사판 감성을 부추기는 곳. 일정상 해리 포터 스튜디오는 찾지 못했지만 반나절이라도 옥스퍼드를 거닐며 해리 포터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옥스퍼드까지 온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옥스퍼드 기차역에서 17분 정도 가면 비스터 빌리지에 닿는다. 비스터 컬렉션은 런던, 파리, 밀라노, 바로셀로나, 마드리드, 더블린, 브뤼셀 등 유럽을 비롯하여 중국의 상하이,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는 쑤저우, 그리고 올 10월에 새로 오픈한 뉴욕의 벨폰트 파크 빌리지까지 전 세계 12개 주요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쇼핑 데스티네이션이다. 단순히 아웃렛을 넘어서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숍,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스토랑, 흥미로운 팝업 및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작품 설치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특별한 쇼핑 경험을 제공한다.
런던에서 1시간 걸리는 옥스퍼드셔에 위치한 비스터 빌리지는 비스터 컬렉션이 보유한 빌리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160개 이상 브랜드의 부티크를 보유하고 있다. 빌리지 전체가 전형적인 잉글랜드 남동부 마을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다채로운 레스토랑과 카페가 입점해 있어 마치 여행하듯 쇼핑과 미식을 함께 즐기기 좋다. VIP를 위한 라운지인 아파트먼트에 먼저 들어섰다. 가구와 액자, 심지어 화장실 인테리어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영국적인 섬세함이 돋보였다.
비스터 빌리지는 쇼핑에 대한 욕망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첫 번째 들어간 브랜드 숍에서부터 믿을 수 없는 할인 가격에 ‘필요한 것 딱 하나만 사자’고 한국에서부터 되새김질한 굳은 결심이 증발했다. 막스마라, 로에베, 멀버리, 룰루레몬이 가격대가 특히 좋다. 리빙 제품에 관심이 많다면 런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뱀포드(Bamford)’를 추천한다. 얼굴에 대기만 해도 부드러운 수건과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자연의 향을 내뿜는 디퓨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을 더 값지게 만들어줄 것이다. 영국 왕실 향수 브랜드인 ‘펜할리곤스’나 영국 패션 브랜드 ‘바버’도 놓치면 아깝다. 무거운 짐이 부담된다면 핸즈 프리 쇼핑 서비스나 퍼스널 쇼퍼 서비스를 이용하자. 퍼스널 쇼퍼 서비스는 48시간 전에 예약하면 아파트먼트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핸즈 프리 쇼핑은 방문객 센터에서 미리 데이권($20) 구입 후 이용 가능하다.
비스터 빌리지 내에는 테라스에서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레스토랑과 카페도 함께 자리해 있다. 2024년엔 영국 스타 셰프 요탐 오토렝기의 레스토랑 ‘오토렝기(Ottolenghi)’가 문을 열어 미식가들의 핫 스폿으로 주목받고 있다. 런던 메이페어에서 이탤리언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체코니즈(Cecconi’s)’의 첫 분점과 아시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산수이(Shan Shui)’, 랄프 로렌의 커피 브랜드 ‘랄프스 커피(Ralph’s Coffee)’ 등 다양한 레스토랑과 카페가 새로운 미식 경험을 선사한다.
PHOTO COURTESY OF BICESTER COLLECTION
런던을 즐기는 법 3가지
런던의 자연친화적 럭셔리 호텔
런던에서 가장 럭셔리한 동네인 메이페어 중심부에 위치한 1 호텔 메이페어는 2023년 7월에 문을 열었다. 자연친화적인 콘셉트의 호텔로 영국산 바닥재, 수작업으로 만든 돌, 정수된 수도물 등 자연 공간을 객실에 끌어들였다. 미슐랭 2스타 셰프인 톰 셀레스(Tom Sellers)가 이끄는 레스토랑 ‘도브테일(Dovetale)’, 시그너처 칵테일 바인 ‘도버 야드(Dover Yard)’에서의 미식 경험도 놓치지 말자.
1hotels.com/mayfair
칠턴 스트리트 탐험
런던 중심부 메릴본에 위치한 칠턴 스트리트에는 칠턴 파이어하우스를 시작으로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이 줄지어 있고 취향 있는 쇼퍼의 발길을 붙드는 숍이 많다. 모노클 카페와 숍, 뉴스 에이전트 스리지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북 스토어 ‘스리지 뉴스에이전트’, 고급스럽고 개성 있는 제품들로 채워진 편집숍 M.II 등을 둘러보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영국 전원 호텔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
3천 에이커의 공원에 둘러싸인 60에이커 규모의 건물, 소설 <제인에어> 속에 나올 법한 분위기의 에스텔 매너(Estelle Manor)는 런던 근교 옥드퍼드셔에 위치한 호텔이다. 회원제로 운영되지만 일반 고객도 묵을 수 있다. 화려한 천장과 거대한 창문,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품, 따뜻한 벽난로와 빈티지 가구까지. 영국 고급 전원 호텔의 로망을 완벽히 충족시킨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로마 목욕탕에서 영감받은 스파도 유명하다.
estellemanor.com
Madrid
마드리드의 맛과 멋
타파스로 시작해 타파스로 끝나다
마드리드 호텔에 도착, 짐을 풀자마자 호텔 인근에 위치한 타파스 바로 향했다. 저녁 8시 30분. 늦은 저녁 식사를 할 겸 찾은 ‘후루차(Jurucha)’는 타파스와 함께 맥주를 마시러 온 로컬로 북적였다. 살라망카 중심부에 위치한 선술집 스타일 레스토랑의 진열대는 먹음직스러운 핀초스와 타파스로 가득했다. 바 뒤쪽에 식사 공간이 있긴 하지만 이미 만석. 할 수 없이 서서 먹기로 한다. 1962년에 생긴 가게라는데 여행객의 입맛에 맞는 타파스보다는 현지인이 즐겨 먹는 핀초스 메뉴가 많았다. 진열대에 있는 핀초스를 몇 개 고른 후(현지인들이 먹는 것을 주로 시켰다)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들이켜자, 비로소 스페인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할라페뇨와 올리브를 김치보다 더 좋아하는 나에게 스페인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타파스류를 매일 먹어도 질릴 일은 없는데, 미식에 일가견 있는 비스터 컬렉션 홍보 총괄인 시아오보(Xiaobo)와 함께이니 미식의 도시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이 더욱 기대됐다.
다음 날, 저녁 식사는 시아오보가 야심차게 예약해둔 보른 지구에 위치한 피스물레르(Fismuler)에서 이루어졌다. 2016년 니노 레드루엘로(Nino Redruelleo)와 팟시 주마라가 (Patxi Zumárraga)가 오픈한 레스토랑으로 <미쉐린 가이드>와 ‘월드베스트 50’에 오른, 현재 마드리드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 중 하나. 그날그날 신선한 로컬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한 달걀노른자와 고구마를 곁들인 트러플 닭날개 요리, 오징어 먹물 소스를 끼얹은 오징어튀김 오믈렛, 바삭바삭한 치즈를 곁들인 뜨거운 조개 요리 등 독창적이고 섬세한 음식이 미식가의 입맛을 충족시킨다. 한꺼번에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씩 제공되므로 큰 테이블에서 코스처럼 나오는 제철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스페인의 타파스 문화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디저트로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쫀득쫀득한 카망베르 스타일의 치즈케이크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예약하는 게 쉽지 않지만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2 1916년 문을 연 마르카도 산미겔 시장. 다양한 타파스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예술이 숨 쉬는 도시
마드리드에서 타파스 말고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미술관이다. 바로셀로나를 가우디와 피카소가 접수(?)했다면 마드리드에는 대항해 시대의 주역이었던 스페인 왕실의 방대한 예술 컬렉션을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 인상파, 현대미술까지 다채로운 예술작품을 보유한 대형 미술관이 여럿 있다. 프라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티센 보르네미사. 일명 마드리드 3대 미술관이라고 꼽히는 미술관이 삼각형을 이루며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3개 미술관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마드리드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보통 프라도 미술관을 먼저 찾지만 나는 프라도 미술관 맞은편에 위치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으로 향했다. 프라도 미술관이 스페인 왕실 수집품에서 시작된 미술관이라면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 가문이 소장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다. 프라도 미술관이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가 스페인 작품 중심이라면 티센 보르네미사는 유럽 미술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컬렉션을 자랑한다. 입구에는 티센 남작 부부의 포트레이트가 ‘환영’의 인사를 하듯 걸려 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시작했다.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개인으로는 세계 2위의 예술 수집가입니다. 13~14세기의 이탈리아 회화에서 현대 작품까지 8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요. 유럽에서 19세기 아메리칸 페인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독일 출신 티센 가문의 소장품이 마드리드에 남아 있는 건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의 다섯 번째 부인인 체르베라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대별로 감상하려면 3층부터 1층 순으로 돌아보는 게 좋다. 3층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르네상스 작품, 2층은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1층은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에서 팝아트까지 근현대 작품을 볼 수 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인>, 얀 반 에이크의 <수태 고지>와 같은 거장의 작품과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남자의 초상>, 카르파초의 <기사의 초상> 등 초상화 컬렉션, 우리에게 익숙한 모네·르누아르·고흐 등 인상파 화가와 피카소·칸딘스키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게 다 개인 소장품이라고?’ 엄청난 규모에 놀랄 새도 없이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컬렉션도 만족스러웠지만 따스함이 감도는 살굿빛 벽, 천장의 유리로 들어오는 자연광, 미술관 내부 인테리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PHOTO COURTESY OF THYSSEN BORNEMISZA
마드리드 왕궁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왕궁 맞은편에 있는 스페인 왕실 컬렉션 갤러리(Galería de las Colecciones Reales)도 가볼 것을 추천한다. 2023년 6월,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왕실 컬렉션 갤러리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프로젝트 중 하나로 꼽힌다. 건축가 투뇬(Tuñón)과 만시야(Mansilla)가 설계한 건물은 10개의 저명한 건축상을 수상했다. 우아하면서 절제된 직선이 돋보이는 4만㎡ 규모의 건물은 마드리드 왕궁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그림, 조각, 태피스트리, 무기, 마차, 문서 등 650여 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지상과 연결된 꼭대기 층에서부터 관람을 시작,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1천300여 년에 걸친 스페인 왕조의 역사와 왕실의 예술에 대한 헌신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이 느껴진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탁 트인 전망대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카사 데 캄포 공원(Casa de Campo Park)과 마드리드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부신 마드리드 전경이 선물처럼 여겨졌다.
2 PHOTO COURTESY OF LA GALERIA DE LAS COLECCIONES REALES
2 건축가 투뇬과 만시야가 설계한 스페인 왕실 컬렉션 갤러리는 마드리드 왕궁과도 연결된다.
스페인 작은 시골마을을 닮은 라스로사스 빌리지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차로 30여 분을 달리면 비스터 컬렉션의 라스로사스 빌리지(Las Rozas Village)에 닿는다. 스페인 작은 시골마을의 정취가 묻어나는 이곳은 아직 초록과 빨간 단풍이 공존하는 초가을 느낌이 물씬 났다. 나무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수공예품과 풍성한 꽃송이, 해골 장식이 눈에 띄었다. “10월 말부터 11월 2일까지는 멕시코 축제인 ‘망자의 날’ 기념주간입니다. ‘망자의 날’은 멕시코에서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를 기리며 그들의 명복을 비는 전통 축제예요.” 라스로사스 빌리지 홍보 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며 빌리지를 둘러봤다. 마드리드에 기반을 둔 멕시코 출신 아티스트와 장인들의 작품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테마파크라도 온 듯 흥이 올랐다. “비스터 컬렉션은 ‘쇼핑이 곧 여가생활’이라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로컬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쇼핑과 예술, 지역 문화를 연결시키며 브랜드를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 일환인지 빌리지 매장의 외관도 아트 피스처럼 변모한다.
빌리지 외관 자체는 소박한 시골마을 풍경과 닮았지만, 명품부터 스페인 럭셔리 라인, 로컬, 라이프스타일까지 브랜드 리스트는 화려하다. 스페인에 온 만큼 스페인 로컬 브랜드를 공략했다. 지속가능한 브랜드 ‘에콜프’, 스페인 왕비 레티시아가 사랑하는 ‘아돌포 도밍게즈’는 특히 가격대가 매력적이다. 스페인 햄인 하몽을 질 좋은 퀼리티로 즐길 수 있는 ‘호셀리토’의 팝업 매장에선 선물용으로 좋은 하몽을 구입했다. 빌리지 안에서 택스리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편리하다. 쇼핑으로 오후 시간을 보내고 해 질 무렵엔 마드리드 최고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아볼 것. 만족스러운 쇼핑 경험을 근사한 여행의 추억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마드리드를 즐기는 법 3가지
달콤한 추로스 맛보기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솔(Sol)역 근처, 초콜라테리아 산 히네스(Chocolatería San Ginés)는 1894년에 문을 연,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추로스집이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추로스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작은 커피잔에 초콜릿을 진하게 녹여 갓 튀겨낸 추로스와 함께 내어준다. 바삭하게 튀긴 추로스를 따끈한 초콜릿에 찍어 먹으면 여행의 피로가 싹 달아나는 기분.
플라멩코 공연 관람
마드리드에 왔다면 정열적이고 강렬한 플라멩코 공연 관람은 필수. 전용 플라멩코 클럽부터 라이브 음악과 춤을 선보이는 레스토랑까지 플라멩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마드리드 개선문 앞에 있는 플라멩코 데 레오네스(Flamenco de Leones)는 맛있는 칵테일과 스페인 타파스를 즐기며 전통 민속무용과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한 공연을 결합한 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flamencodeleones.es/en
토템 마드리드에서 하룻밤
살라망카 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부티크 호텔. 19세기의 역사적 건물에 자리 잡고 있으며 64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고급 사교 클럽의 거실처럼 아늑하고 따스한 분위기의 인테리어, 지중해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편안하게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도 인기 있다.
totem-madrid.com
Antwerp
안트베르펜의 우아함
안트베르펜 보태닉 생크추어리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와~’ 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꽃과 투명한 유리창 밖을 가득 채운 초록 식물들을 보자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 사라지는 듯했다. 시아오보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보태닉 생크추어리 호텔은 안트베르펜에서 최근 문을 연 가장 주목받는 호텔입니다. 이틀간 머물면서 마음껏 호텔을 즐겨보세요.” 12세기에 지은 수도원이었던 호텔은 굵직한 목재 골조와 12세기풍 창문을 그대로 간직한 데다 차분한 벽과 은은한 조명, 실내·외를 채운 식물들이 어우러져 현대적이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온실처럼 초록빛이 가득한 호텔 내부도 마음에 들었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손님들의 스타일이다. 나 같은 외국인 여행객도 있겠지만 벨기에 사람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패션 스타일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아방가르드하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세련된 스타일. 파리의 시크함, 런던의 펑키함과 다른 벨기에만의 우아함이 느껴졌다.
패션 디자이너나 패션업계 종사자들에게 안트베르펜은 벨기에에서 브뤼셀, 브루게보다 인기 있는 도시다. 라프 시몬스, 마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두 안트베르펜 출신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세인트 마틴, 미국의 파슨스와 함께 벨기에 왕립예술학교는 세계 3대 패션 스쿨로 손꼽힌다.
MoMu(안트베르펜 패션 박물관)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패션의 도시 안트베르펜의 DNA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유서 깊은 모데나티(ModeNatie) 건물에 처음 문을 연 미술관은 2021년 벨기에 건축 사무소 비 아키텍튼(B architecten)이 레노베이션하며 확장 완성됐다.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나무 계단과 삼각형의 유리 천장, MoMu 로고가 새겨진 천장의 조명이 MoMu만의 정체성을 집약해 보여준다. 패션의 이면에 숨겨진 철학과 역동성, 패션의 역사와 미래를 차분히 관찰할 수 있는 전시들이 주로 열리는 이곳에선 매년 두 차례의 특별전을 개최하는데, 2024년 가을부터 2025년 2월 2일까지 열리는 «Masquerade, Make-up & Ensor»전은 가장무도회와 화장에 대한 제임스 엔소르의 시선을 조명한다.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한 벨기에 출신 화가 엔소르의 작품 외에 사진, 영상, 빛과 색이 어우러진 멀티미디어 전시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새로 정의한다. 2025년 봄에는 안트베르펜의 패션 디자이너 얀 얀 판 에스셰(Jan Jan Van Esseche)의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 미묘한 레이어와 균형 잡힌 비율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온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특별 전시 외에 박물관에 보관된 3만 8천여 개의 컬렉션 의상은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 또한 패션과 섬유, 민족 의상에 대한 1만 5천여 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어 아카이브적 가치도 상당하다.
2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는 MoMu 내부.
3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이 멋스러운 MoMu 외관.
플랑드르 예술의 정수
2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은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안트베르펜은 패션의 도시지만 나에겐 ‘루벤스’의 도시이자, <플랜더스의 개>의 도시이기도 하다.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의 플랜더스(플랑드르)가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벨기에 북부 지역을 통칭한다는 것을 성인이 된 지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 안트베르펜 성모마리아 성당에 가면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걸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루벤스의 흔적을 더 좇고 싶다면 루벤스 저택도 들러볼 만하다. 하우스 내부는 현재 레노베이션 중이지만 루벤스 체험관과 라이브러리, 정원은 개방되어 있다. 체험관에서는 실물과 같은 동영상과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통해 루벤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루벤스의 취향이 깃든 신고전주의 양식의 안뜰은 바쁜 여행자에게 휴식을 선사한다.
10년 넘게 문을 닫고 있다가 최고 수준의 레노베이션 공사를 마치고 2022년에 오픈한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KMSKA(Royal Museum of Fine Arts Antwerp)는 플랑드르 거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미술관들이 주로 왕실이나 귀족, 성직자들의 컬렉션으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데 반해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은 화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길드’를 통해 수집된 작품을 기초로 설립된 미술관이란 점이 특별하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회화, 조각, 소묘와 판화 등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플랑드르 정부의 미술관답게 플랑드르 출신 화가의 작품이 풍부하다. 루벤스, 브래켈리어, 아벨 그리머를 비롯해 근대 표현주의의 대가인 제임스 엔소르와 야수파 화가 릭 바우터스의 작품도 다수 전시하고 있다. 특히 루벤스는 전시실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제임스 엔소르와 릭 바우터스의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관 앞 수변 광장은 지역 주민들을 한데 모으는,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활기찬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동화적인 마스메헬렌 빌리지에서 쇼핑하기
패션의 도시에 왔으니 쇼핑은 필수다. 마스메헬렌 빌리지는 안트베르펜과 브뤼셀 사이에 차로 1시간여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가 만나는 교차로에 위치해 독일 쾰른 또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찾아가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여행객뿐 아니라 로컬도 많이 찾는 곳. 아이와 반려견까지 동반한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림뷔르흐 지역의 건축과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유산에서 영감을 받은 빌리지는 아기자기하면서 동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마스메헬렌 빌리지는 19세기부터 1980년대까지 이용되던 탄광이 있던 땅에 지어졌다. 지붕과 창틀 디자인의 일부는 아이스덴 탄광 노동자들을 위해 20세기에 지어진 동네인 아이스덴-티인베이크의 건축을 반영했다. 브뤼셀의 상징인 오줌 싸는 소년 동상과 금박을 두른 순록, 아토미움의 조형물에서는 벨기에만의 화려함이 느껴진다.
벨기에 로컬 브랜드와 세계 각국의 100개 이상 브랜드의 부티크가 연중 할인을 제공한다. 로레알, 프티푸리, 맘무트가 2024년 새로 입점했으며 크리스마스 용품점도 있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더욱 인기가 많다. 벨기에 초콜릿 선물을 사기에도 좋다. 쇼핑을 하다 출출하면 라 프티 벨지(La Petie Belge)와 기울리아노(Giuliano) 레스토랑에서 벨기에식 홍합 요리와 감자튀김으로 허기를 달래도 좋겠다.
2 상류층의 고급 아파트처럼 꾸며진 마스메헬렌 빌리지의 아파트먼트.
안트베르펜을 즐기는 법 3가지
안트베르펜 중앙역 감상하기
세계 유수한 잡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곳.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 때문에 ‘철도계의 대성당’이라 불린다. 벨기에 건축가 루이 델라 센세리가 지은 역사는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완성됐다. 화려한 돔과 웅장한 계단, 고딕 양식의 시계탑 등 아름다운 내관 때문에 기차를 타지 않는 여행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과거 일등석 이용객들의 라운지로 사용됐던 고풍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나 벨기에 맥주를 한잔 마셔도 좋다.
미슐랭 레스토랑 더 제인(The Jane)에서 미식 경험
2014년 닉 브릴이 오픈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과거 군병원으로 사용되던 교회 건물에 조각작품 같은 샹들리에를 걸고 아름다운 오픈 키친으로 꾸며 수십 명의 셰프가 쉴 틈 없이 요리하는 장면을 실시간 감상할 수 있다. 해산물, 육류 등에 다양한 재료를 조합해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창의적인 맛을 선사한다. 코스 구성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며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모든 코스 요리를 경험하려면 약 4시간이 소요된다.
thejaneantwerp.com
복합공간 흐란마르크트 13(Grnnmarket 13)에서 쇼핑하기
16세기부터 안트베르펜 중앙 광장에서 다양한 제품을 팔던 시장인 ‘흐란마르크트’에서 이름을 가져온 복합공간. 저마다의 콘셉트를 가진 레스토랑, 스토어, 부티크 호텔이 하나의 건물에 들어서 하나의 브랜드로 운영된다. 지하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잠시 휴업 중이지만 1층의 콘셉트 스토어에서는 고급 의류, 가방, 신발, 뷰티, 리빙용품 등 감각적인 제품들을 판매한다. 1층 갤러리는 전시회 및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고 위층은 부티크 호텔로 운영된다.
graanmarkt 13.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