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말한다. “코타키나발루에 선셋 말고 뭐가 있는데?”
동향에 베란다가 있는 크지 않은 아파트에 사는 나는 노을을 잘 보지 못한다.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 매일 아파트 통창으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코타키나발루에 ‘선셋’ 말고 볼 게 없다고 하더라도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지난해 코타키나발루를 다녀왔다. 그리고 명성처럼 황홀한 석양을 매일 만났다. 선셋에 미친 사람인 양 매일 노을을 보면서 왜 이곳의 석양이 아름다운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챗GPT에게 물었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 아름다운 건, 풍경이 예쁘다는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요소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결과입니다.” 우선 위치다.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다. 해안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태양이 바다로 지는 모습을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다. 습도가 높지만 바람이 잘 불어 대기 중 수분과 먼지 입자의 크기와 밀도가 이상적이다. 이런 조건은 산란 현상을 일으켜 붉은빛, 주황빛, 분홍빛, 자줏빛 등 다채로운 색깔을 만들어낸다. 적도 가까이에 있어 일몰 시 태양의 이동 경로가 낮고 길게 펼쳐져 빛이 넓게 퍼지는 것도 한몫한다. 과학적인 근거까지 알고 나니 코타키나발루를 다시 가야 할 이유는 명확해졌다. 노을만 봐도 이 여행은 나에겐 남는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선 좀 쉬고 싶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다가 선셋 시간에 맞춰 편하게 노을을 감상할 수 없을까? 코타키나발루를 수십 번 다녀온 사람이 추천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느긋하게 한 곳에 머물며 쉬고 싶다면 수트라하버 리조트로 가세요. 곳곳이 선셋 명당이니까요.”

랜드마크가 된 리조트
리조트가 랜드마크가 되기 위해선 역사성과 상징성, 독보적인 규모, 지역 주민과의 교류, 유명 관광지와의 인접성, 공항 접근성 등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27홀 골프장, 마리나 요트 선착장, 5개의 수영장, 스파 등을 갖춘 대규모 고급 복합 리조트인 수트라하버 리조트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의 랜드마크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랜드마크 리조트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리조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될 수 있느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빽빽하게 일정표를 채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리조트 안에만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ENFP인 내가 과연 리조트에서만 3박 4일을 머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채 코타키나발루로 향했다. 인천, 부산에서는 코타키나발루 항공편이 매일 운항한다. 밤 비행기로 출발해 새벽에 도착한 뒤 수트라하버 마젤란 리조트에 다다랐다. 공항에서 10여 분 거리로 접근성이 뛰어난 것이 수트라하버의 장점이다. 말레이시아 사바 룽구스 부족의 롱 하우스 스타일로 지어진 높은 층고의 웅장한 로비에 들어서자 이곳의 스케일이 짐작됐다. 수트라하버에는 마젤란 수트라 리조트(이하 마젤란 리조트)와 퍼시픽 수트라 호텔(이하 퍼시픽 호텔), 두 개의 숙소가 있다. 어떤 숙소를 선호하느냐는 개인의 취향에 달렸다.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마젤란 리조트를 추천한다. 자연 친화적으로 건축된 마젤란 리조트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전통미가 조화를 이루는 객실을 갖추고 있다. 반면, 모던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선호한다면 퍼시픽 호텔이 제격이다.
마젤란 이그제큐티브 스위트 객실은 넓은 거실과 두 개의 화장실, 테라스를 갖추고 있었다. 단잠을 청한 후 느지막이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야자수가 우거진 정원 너머로 푸른 바다가 넘실댔다.
리조트 안에서만 보내는 휴가가 얼마 만인가. 넓은 소파에 누워 책을 읽은 후, 붐비는 조식 뷔페 레스토랑 파이즈 세일즈 대신 마젤란 클럽 라운지에서 한가롭게 조식을 즐겼다. 식사를 마친 후 리조트 지도를 펼쳐 들고 요트 선착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마젤란 리조트에서 퍼시픽 호텔과 마젤란 클럽, 요트 선착장에 이르는 길은 산책하기에도 좋지만 러닝 코스로도 훌륭하다. 산책 후엔 쿤두안 갤러리에 들렀다. 2025년 4월 오픈한 이곳에서는 말레이시아 공동체를 이루는 다양한 소수민족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전통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원주민 의상을 직접 착용해볼 수도 있다.


골드카드로 못 하는 게 뭔데?
리조트 밖으로 나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건 나에게 ‘골드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골드카드가 있으면 수트라하버 리조트에서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골드카드는 리조트 내 모든 시설을 더욱 편리하고 품격 있게 누릴 수 있는 올 인클루시브 서비스다. 골드카드가 있으면 매 끼니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대신 ‘리조트 내 어느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걸 먹을까?’라는 즐거운 고민이 시작된다.
아침엔 마젤란 리조트와 퍼시픽 호텔의 조식 뷔페 이용이 가능하고, 점심에는 카페 볼레, 알프레스코, 더 테라스, 마리나 카페 등 총 7개의 레스토랑 중 선택할 수 있다. 저녁에는 카페 볼레, 브리즈 비치 클럽, 알프레스코, 페르디난드 4곳에서 세트 메뉴 이용이 가능하다. 또한 마리나 클럽에서 볼링, 테니스, 피클볼, 스쿼시 등의 액티비티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식음료·해양 액티비티·스파·요트 등은 10%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마젤란 리조트에 있는 이탤리언 레스토랑 ‘알프레스코’는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바닷바람을 느끼며 식사할 수 있어 외부 손님도 자주 찾는다. 음식도 맛있지만, 아무래도 알프레스코의 메인 디시는 ‘석양’이다. 아침에 내린 폭우 때문에 노을이 약할까 걱정했지만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전·오후 한 차례씩 내리는 스콜이 대기 중 먼지를 씻어내 더욱 아름다운 석양을 만든다. 수트라하버 내에서도 ‘선셋 맛집’으로 유명한 알프레스코는 일몰 시간대에는 자리가 빨리 차므로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골드카드 소지자가 반드시 이용해야 할 곳은 바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페르디난드’다. 사바 투어리즘 어워드에서 최우수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이곳에서 골드카드 소지 고객은 인당 15달러만 추가하면 트러플파스타와 스테이크가 코스로 나오는 수준급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이런 정찬을 즐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통창 너머로 별빛이 쏟아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와인 한잔을 곁들이니, 여자친구와 왔는데도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얼굴이 달아올랐다. 또 골드카드 소지자가 꼭 이용해야 할 레스토랑은 퍼시픽 호텔에 위치한 ‘카페 볼레’다. 석식 뷔페에서는 신선한 해산물과 양고기, 스테이크 등 고기류를 푸짐하게 즐길 수 있다. 메뉴가 다양해 남녀노소 모두 만족도가 높다.

스포츠 마니아의 전당
“리조트에 수영장이 다섯 개나 있다고?”
수영은 잘 못하지만 물놀이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기대했던 곳은 수영장이었다. 매일 오전·오후 어느 수영장으로 향할지 스케줄표를 짰다. 마젤란 리조트의 수영장은 수심이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이어져 아이와 어른이 함께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다리 건너편에는 아이들 전용 수영장이 있어 가족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방에서 가장 가까웠지만 낮에는 어린이와 가족 단위가 많아서 점심 시간을 피해 선셋 바에서 노을을 본 뒤, 수영장이 문을 닫는 오후 8시까지 저녁 수영을 즐겼다.
마리나 클럽에는 두 개의 수영장이 있다. 둘째 날 오전 찾은 마리나 클럽 수영장은 요트가 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할 수 있어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 옆에는 슬라이드와 미니 폭포가 있어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다. 수영 자체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레인 수영장을 추천한다. 50m 레인 수영장을 보자, 서울에서 ‘수영에 미쳐’ 전국 원정 수영을 다니는 여행작가 친구가 떠올랐다. 올림픽 규격의 넓은 레인 수영장에서는 언제든 방해받지 않고 수영할 수 있다. 퍼시픽 호텔 수영장은 수영하다가 웨이브 풀 바에서 칵테일을 즐길 수 있어 커플이나 친구들끼리 즐기기에 좋다.
스포츠 마니아에게 수트라하버는 완벽한 놀이터다. 마리나 클럽 안에는 다양한 스포츠 시설이 모여 있다. 세계의 많은 럭셔리 리조트를 가봤지만 이렇게 큰 스포츠센터를 가진 리조트는 흔치 않다. 피트니스 클럽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 좋은 볼링장, 탁구장, 테니스장, 배드민턴장, 스쿼시장, 포켓볼장, 그리고 요즘 전 세계적으로 열풍인 피클볼장까지 갖췄다. 여행 와서 스포츠를 즐기는 ‘스포츠 투어리즘’이 인기인 요즘, 멀리 갈 필요 없이 리조트 내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수트라하버의 최대 강점이다. 마리나 클럽 때문에라도 이곳을 찾을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렌디한 운동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들이 활기차게 피클볼을 하거나, 커플·친구들이 함께 테니스를 치거나, 3대 가족이 볼링을 치는 모습에서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또 아름다운 해안가 지형에 드넓게 자리한 27홀 골프 코스는 이미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골프 디자이너 그레이엄 마시(Graham Marsh)가 설계해 아마추어뿐 아니라 프로 골퍼들 모두 극찬하는 골프장이다.

마누칸섬에서의 망중한
리조트 밖으로 나갈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섬 호핑 투어’. 툰쿠 압둘 라만 해양공원은 코타키나발루 여행에서 빼놓기 아까운 장소다.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과 다채로운 해양 생태계를 감상할 수 있는데, 섬마다 독특한 매력이 있어 한 곳이라도 꼭 들러볼 만하다. 보통은 시내 제셀톤 항구에서 출발하는 투어 상품을 이용하지만, 나는 제셀톤 항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골드카드 소지자는 수트라하버 마리나 선착장에서 마누칸섬까지 가는 페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누칸섬은 툰쿠 압둘 라만 해양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섬 중 하나다. 마리나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페리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마누칸섬에서 돌아오는 페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영된다. 스노클링 장비를 챙긴 후 마누칸섬으로 가는 페리에 올랐다. 일행을 실은 페리가 맑은 바다를 시원하게 질주한다. 15분 정도 달리니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착장 앞에 위치한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은 물빛이 맑고 파도가 잔잔해 스노클링, 패러세일링 등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에 좋다. 준비해 간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물속을 유영하다가 하얀 모래사장에 누워 망중한을 즐겼다. 물놀이를 하다 출출해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골드카드가 있으면 레스토랑 ‘아랑’에서 바비큐가 포함된 점심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바비큐를 준비하는 데 1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섬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하는 것이 좋다. 푸짐한 바비큐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노을 사냥꾼이 되는 법
머무는 동안 일정은 단순했다. 오전엔 운동, 오후엔 수영, 오후 5시부터는 선셋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부터 리조트 전체는 노을 극장이 된다. 리조트 내 바다를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장소가 선셋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알프레스코 앞의 선셋 바는 칵테일을 마시며 노을을 즐기기에 좋아 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든다. 브리즈 비치 클럽(Breeze Beach Club)은 수영장 옆에 있어 수영하다가 노을을 맞이하기에 좋다. 루프 톱에서 칵테일 한 잔 마시며 일몰을 감상하고 싶다면 퍼시픽 호텔 12층의 호라이즌스 스카이 바(Horizons Sky Bar)로 가면 된다. 요트 선착장을 물들이는 노을은 수트라하버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마젤란 리조트에서 선착장까지 석양을 쫓아 걸어가는 중 건물 뒤로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노을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며 한참 서 있거나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며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다 함성을 지르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왠지 뭉클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노을과 무지개를 동시에 보니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어린왕자가 해가 지는 풍경을 보기 위해 마흔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는 게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코타키나발루를 즐기는 5가지 방법
- 리카스 모스크 이슬람 메카 인근의 마디나 나바위 모스크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모스크로, 독특한 건축양식과 푸른 돔이 인상적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 때문에 사진 촬영 명소로도 유명하다. 입장료를 내고 내부 관람도 해볼 만하다.
- 마리 마리 민속촌 사바 지역에 거주하는 5개 부족의 전통가옥과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한 마을. 원주민 가드의 안내에 따라 5개 부족이 살았던 독특한 가옥을 둘러보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 탄중 아루 비치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6km 떨어진 해변으로, 일몰 명소로 손꼽힌다. 노을이 지는 해안선에서 황금빛 하늘과 바다, 섬이 어우러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제트스키나 패들보드, 바나나보트 등의 수상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 필리피노 마켓 코타키나발루에 이주한 필리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열리던 작은 시장이 현지인까지 몰려들며 점점 규모가 커졌다. 생선, 새우, 갑각류 등 신선한 해산물과 망고, 망고스틴 등의 과일, 각종 수공예품을 구입할 수 있다.
- 반딧불이 투어 코타키나발루 인근 베링기스나 봉가완 등에서는 맹그로브 숲을 따라 보트 크루즈를 하며 반딧불이를 관찰하는 투어를 할 수 있다. 보통 해 질 무렵 시작해 강 주변의 맹그로브 숲을 천천히 지나면서 야생 동식물과 강변의 생태를 함께 체험하는 형태로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