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제민천의 낭만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LEE JISOO
  • PHOTOGRAPHY BY jeon jaeho

공주 제민천의 낭만

Find a Sense of Community in Jemincheon

충청남도 공주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물길 금강. 이 금강의 지류 가운데 하나가 제민천이다. 강 너머 신도시 개발로 1980년대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줄어들었던 제민천 마을이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맞으며 몇 년 사이 마을 재생의 교과서가 됐다. 고즈넉한 공주에 북적이는 숨결을 불어넣은 제민천 마을에서 찾은 여섯 가지 키워드.
  • written by LEE JISOO
  • PHOTOGRAPHY BY jeon jaeho
2024년 05월 30일

권오상

Creator

‘찬란한 문화’ 혹은 ‘백제의 유산’ 같은 과거 의존적 수식어를 제한다면, 공주를 표현할 방법은 현저히 적다고 생각했다. 1960~70년대 하숙을 치던 원도심이 외면당한 것은 몇 년 전까지의 일이었다. 2018년경부터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제민천을 따라 제민천 마을이 떠오른 것. 바쁜 일상에 지친 서울의 청년들이 작은 천과 뒤를 아우르는 산, 마을을 품고 있는 듯한 커다란 학교가 있는 마을에 마음을 뺏겼고 하나둘 둥지를 틀었다. 일찌감치 이 작은 마을이 주는 힘에 이끌려 무작정 허름한 한옥 하나를 계약한 권오상 퍼즐랩 대표는 멈춰 있던 제민천의 시계를 움직인 주력 인물. 올해로 7년째 제민천 마을을 지키고 있는 그가 생각하는 뉴로컬의 힘은 무엇인지 들었다.

Q 고고학을 전공하고 IT회사 영업직을 거쳐 경기관광공사 해외마케팅 담당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력을 지녔다. 갑작스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려올 만큼 확신을 가진 이유는 무엇이었나?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크게 고민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아내와 항상 그려왔던 한옥이 있었는데 봉황재가 딱 그랬다. 작은 마당과 기역자 한옥. 그래서 정착했다. 제민천이 주는 매력도 충분했다. 역사문화자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골목, 개천을 따라 이어진 귀여운 가게들. 작은 마을인데 도시 구획이나 가로 구성이 오래전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좋았다. 원래 하던 일이 한 지역에서 여행 코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민천은 내 경력을 충분히 받아줄 것만 같았다.

Q 커뮤니티 베이스 투어리즘(CBT)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 한 명의 노력으로 쉽게 되는 일은 아닐 텐데?

제민천은 보수적인 동네고 자부심이 높은 동네다. 화려한 옛 도심에 대한 기억을 가진 어르신들이 많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이 동네가 하숙을 했던 곳이라는 것. 어르신들은 대부분 하숙생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이곳에 와 자리를 잡거나 일을 하는 것을 무척 반겼다.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이 다음 오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고, 그들이 또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든다. 봉황재라는 숙박시설을 기반으로 1박 2일 마을 투어, 5박 6일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강북이나 구도심을 좋아하고 골목 상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민천을 좋아했다. 관광이나 워케이션으로 왔던 사람들이 이주해 카페를 만들었고 음식점이 생겨났다. 워케이션 공간, 갤러리, 공방이 생겼다. 관광객을 붙잡을 수 있는 오리엔티어링 같은 프로그램도 만들어졌다. 이제는 제민천에서 주민들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 자체가 여행 콘텐츠의 일부로 보여진다. 원주민의 성향과 지리적 요건, 마을의 역사성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Q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은 몰리는데 아직 프랜차이즈, 즉 흔히 볼 수 있는 유행 음식점이 없다.

아직 그 정도의 상권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게다가 가능한 마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리단길’로 끝나는 공간이 된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올 것이고 그러면 이주민들이 떠나가고 매력을 잃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서 만일 마을 초입에 저렴한 가게가 부동산에 나왔다면, 그 공간에 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동시에 매물을 잡아둔다. 마을과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연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가능하다.

Q 1박 2일 머물 동안 바쁘게 돌아다니는 당신과 수없이 마주쳤다. 7년여간 프로젝트를 지속하며 활발하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제민천 마을 같은 뉴로컬의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하숙마을이라는 역사, 옛 공주읍사무소처럼 아직 남아 있는 건축물, 나태주 시인의 집이나 문학관 같은 관광자원. 그리고 이에 더해 정착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다. 그들이 여기서 자신과 꼭 어울리는 공간을 오픈할 때 짜릿하다. 로컬은 여행자가 공급자도 되고 소비자도 될 때 변화를 맞는다. 덜 대중적이고 자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오컬트 전문 서점이나 타투숍, 인센트 전문가처럼 개성 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채울 때 로컬이 힘을 발휘한다.


퍼즐랩

Project

권오상 대표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주식회사 퍼즐랩은 공주 원도심 기반의 지역관리회사다. 토박이 주민과 이주민이 모두 퍼즐이라는 개념하에 퍼즐을 맞춰 지역의 가능성을 높이고 영역을 확장한다는 의미다. 공주 최초의 노인회관을 리모델링해 ‘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탈바꿈하거나 식당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부터 N잡러의 귀촌을 돕기 위한 마을생활 튜토리얼 프로젝트, ‘유니크(독특한)’와 ‘베뉴(장소)’의 합성어 유니크베뉴를 도입해 마을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까지. 제민천 마을에서 일어나는 신선한 행사는 퍼즐랩으로부터 시작한다. 워케이션 프로그램 ‘로그인 공주’에도 퍼즐랩이 지향하는 철학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5박 6일로 진행하는 워케이션은 숙소와 공유 오피스를 제공해 마을 안 커뮤니티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제민천 마을을 찾은 이들이 자연스레 로컬 커뮤니티와 연결되며 느슨하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권오상 대표가 로그인 공주를 두고 “생활인구 늘리기인 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퍼즐랩이 주로 진행하는 인사이트 트립은 당일과 1박 2일짜리 마을 투어다. 지역의 맛집이나 공간을 방문해 운영자와 직접 이야기 나누고 필요하다면 토크쇼나 작은 포럼 등을 열어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창업진흥원이나 중소벤처기업부 등 관련 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교육도 진행한다.


홀로 즐기는 취향의 시간

Untact

가가책방 충남 공주시 당간지주길 10

하솜공방&고마스토리무인샵 충남 공주시 감영길 19 1층

블루프린트북 충남 공주시 제민천1길 55 3층

갤러리마주안 충남 공주시 대통1길 56-6

고요히 흐르는 제민천을 사이로 두고 작고 귀여운 문화 공간이 포진해 있다. 다만 이 공간들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언택트로 운영되는 서점과 갤러리가 차분한 제민천 여행을 돕는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제민천 마을의 초창기 멤버가 운영하는 가가책방은 걷다가 지친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무인 서점. 예약만 하면 24시간 내내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 수 있고 1인당 5천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고전문학을 선호하는 책방지기의 취향 덕분에 비정기적으로 고전 독서 모임이나 북토크가 열린다. 하얀 벽돌로 만든 거대한 반원형의 외관이 모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블루프린트북에는 매거진, 에세이, 미술사 등에 대한 책이 주를 이룬다. 아늑한 복층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제민천을 내려다보며 잠시 쉬어가기 좋다. 책을 구입하고 싶다면 수기로 책 제목을 적고 셀프 결제하면 된다. 갤러리마주안은 100년 넘은 한옥을 개조한 현대미술 갤러리로 역시 무인으로 운영된다. 규모는 작지만 미술에 관심 있는 관광객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공주와 백제의 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하솜공방&고마스토리무인샵도 언택트로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는 굿즈숍이다.


자유도

Space

베어루트 충남 공주시 웅진로 121 102호

단편선 충남 공주시 웅진로 119-1 2층

요모도모 충남 공주시 당간지주길 10

‘자유도’는 당초 퍼즐랩이 청년 정착 프로그램을 위해 도입한 큰 개념. 하지만 결국 놀러 왔다가 눌러앉는,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돕는 커뮤니티와 다름없다. 제민천에는 마치 날실과 씨실처럼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연결된 청년들이 창업한 작고 귀여운 공간이 넘친다. 베어루트는 공주의 풍경과 곰 캐릭터를 활용한 의류, 컵 등의 굿즈를 판매하는 편집숍이다. 체육교사를 하던 베어루트 김기석 대표는 이주 후 제민천을 따라 달리는 나이트 러닝이나 체험형 로드 액티비티와 여행을 접목한 투어 콘텐츠를 제공했는데, 손님들로부터 공주와 관련된 굿즈 판매숍이 적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오픈했다. 아담한 편집숍 단편선도 워케이션으로 제민천을 찾은 청년이 창업한 공간이다. 엽서, 다이어리, 문구류가 주로 이루는 것은 여행에서 일기를 쓰는 주인장의 취향이 반영됐다. 요모도모는 가가책방 옆에 있는 작은 일러스트 작업실 겸 쇼룸. 작가가 직접 만든 잔이나 귀여운 소품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다.


업스테어스

Workation

코워킹스페이스 업스테어스를 마주하면 대학 시절 잊고 있던 동아리방 생각이 진하게 난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을 리모델링한 업스테어스는 누구나 와서 일할 수 있는 느슨한 공간이다. 봉황재라는 숙소가 처음 생긴 이후 대부분의 사람이 더 많은 숙소나 카페가 문을 열거라 예상했지만, 퍼즐랩의 두 번째 선택은 업스테어스였다. 외부인에게 원도심 투어를 제공하며 제민천 마을에 창업하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그들이 일을 할 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을 건축가가 기획하고 주민들이 직접 자재를 공수해왔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마을 청년들이 타일 붙이는 일부터 페인트칠까지 완성했다. 벽이 사선으로 된 탓에 딱 맞는 가구가 없을 때도 주민들이 용접기를 가져와 조립해줬다. “주거공간으로 사용했던 이곳을 처음 리모델링할 때, 범상치 않은 연꽃무늬 벽지가 숨겨진 것을 보고 그제야 언젠가 점집으로 사용했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이곳을 퍼즐랩의 사무공간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권오상 대표가 회상했다. 2019년 오픈 후 북토크나 지역 재생 포럼, 초청 강연 등 지금의 제민천 마을이 되는 데 거름이 된 다양한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포토그래퍼나 영상 PD, 교육 서비스를 하는 개인사업자 등이 함께 쓰는 공간인 동시에 2박 3일이나 5박 6일짜리 코워킹 프로그램 ‘로그인 공주’의 코어가 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사실 엄격한 규율이 정해지지 않아 주민이나 여행자 누구나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자리 잡고 노트북을 켤 수 있고 창업에 관련된 다양한 책을 읽다 가기도 한다.


제민천의 맛

Taste

루치아의 뜰 충남 공주시 웅진로 145-8

고가네칼국수 충남 공주시 제민천3길 56

체스넛 프렌즈 충남 공주시 봉황로 64

가마솥국밥보쌈 충남 공주시 웅진로 145-10

아저씨커피 충남 공주시 먹자1길 1

예술가의 정원 충남 공주시 큰샘2길 10-5

제민천 마을엔 이주민들이 연 식당과 카페가 많은데 주목할 점은 공간이 하나같이 주인을 닮았다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힐링 받고 온다”는 아저씨커피가 그렇고, “어느 날에 가도 꽃향기가 난다”는 루치아의 뜰이 그렇다. 족히 10년은 넘은 듯 보이는 아저씨커피는 사실 2년 남짓한 로스터리 카페다. 제민천을 따라 난 길 귀퉁이의 카페 2층에 올라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지나쳤던 사람을 또 보기 일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기차 안 승객처럼 저절로 손을 흔들게 된다. 마을의 터줏대감 루치아의 뜰은 차를 좋아하는 아내 루치아가 대학교수였던 남편과 10년째 정성으로 관리하는 찻집이다. 1964년에 상량한 한옥을 가온건축의 임형남, 노은주 부부가 리모델링해 지금의 모습으로 바꿨다. 카페 입구 골목길에서부터 정원까지,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지게끔 관리 중이다. 바로 옆 가마솥국밥보쌈은 주민들에겐 ‘석화장’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데, 1980년대까지 부모님이 운영하던 여관 석화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국밥집이기 때문. 간판 그대로 달린 레트로한 외관은 물론 내관도 객실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했다. 제민천의 유명 맛집 고가네칼국수에선 실패 없는 칼국수 전골을, 최근 오픈한 한옥 카페 체스넛 프렌즈에선 공주밤을 가득 넣은 디저트를 즐겨보자. 좀 더 걷고 싶다면 봉황재 뒤쪽에 자리한 예술가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 후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