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중앙> <쎄씨> <키 키> <싱글즈> 등 인기 매체를 거치며 패션 잡지의 황금기를 주도했던 강신혜 대표는 마침표 하나까지 허투루 넘기지 않는 완벽주의 성향 덕분에 업계에서 ‘강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편집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뷔페에서 식사 예절을 가르쳐주고, 대학 진학 시기에는 양식당에서 나이프와 포크 쥐는 법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맛본 요리를 여섯 남매를 위해 집에서 재현해주곤 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있던 시기, 딸에게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고조리서 <반찬등속>과 관련된 어떤 일이든 해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 대표는 고민 끝에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 위해 사표를 던졌다. “요리가 오랫동안 즐기던 취미이기도 했지만, 긴 시간 몸담은 직업을 그만두기가 쉽진 않았죠. 하지만 출근길에 설렘이 아닌 두려움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깨닫고 미련 없이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어요.”
<반찬등속>은 진주 강씨 가문으로 시집온 밀양 손씨가 일찍 부모를 잃은 어린 손자 강규형을 앉혀두고 집안 대소사와 생활의 지혜를 일러준 것을 바탕으로, 손자가 할머니 사후 4년이 지난 1913년에 엮은 일상의 기록이다. 김치와 짠지, 떡, 한과, 술 등 47종에 달하는 음식 조리법과 더불어 가구와 의복의 명칭, 사자성어까지 1910년대 청주 지역의 생활상이 상세히 담겨 있다. 총 32장으로 이루어진 이 조리서는 문헌적 가치가 높아 당시 내륙 지방의 생활사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지금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381호로 지정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강신혜 대표는 이 책을 남긴 밀양 손씨의 4대손이다. “<반찬등속>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전래음식연구회에 등록해 요리를 배우고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며 기초부터 다졌어요. 매일 아침 도서관과 관련 서적을 뒤져가며 본격적인 고서 연구에 돌입했죠. 밤부터 새벽까지는 익힌 조리법을 바탕으로 직접 주방에서 만들었고요. 4년 정도 걸렸어요. 마침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라 공부하기 좋았죠.(웃음) 이 과정에서 당시 고조리서에 기록된 음식을 먹어봤던 60대와 70대인 육촌 언니 등 친척들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며 고증을 거쳤어요.”
처음에는 생소한 옛 문장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 그리고 1970년대 요리책까지 폭넓게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그는 이 책이 단순한 요리 지침서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무엇을 먹고, 어떻게 저장하며, 누구와 나눌지 고민했던 선조들의 생존 기록임을 깨달았다.
강신혜 대표는 오랜 연구의 결과물로 2022년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김치 하는 이야기>와 2024년 <반찬등속, 할머니 말씀대로 한과 하는 이야기>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금강을 거슬러 내륙인 청주의 곡창지대 상신동까지 올라온 조기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찹쌀 풀이나 밀가루 풀을 전혀 쓰지 않는 방식이나 고춧가루 대신 말린 고추와 고춧잎을 활용한 특징들을 짚어냈다. “특히 <반찬등속>에 등장하는 짠지는 한강이나 남한강이 아닌, 전라도 강경에서 부여와 공주를 거쳐 청주까지 평야 지대로 이어지는 금강 생활권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는 청주까지 소금이 운송된 방식이나 사용된 소금의 종류를 규명하는 등 재료와 조리법에 담긴 정당성을 꼼꼼하게 밝혀냈다. 두 번째 저서에서는 옛 레시피를 분석해 과학적인 한과 제조 원리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부엌에서 이어가는 오늘의 기록
책을 집필한 이후 강신혜 대표는 학술적 성과와 직접 만든 디저트를 일상에서 나누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청주 상당산성 아래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1913 청주부엌’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초에는 음식을 내어주는 연구소 형태로만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음식을 판매하지 않으면 객관적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공짜로 주면 다 맛있다고 해요.(웃음) 사 먹으면 얘기가 좀 달라질 것 같고, 제 실력이 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강 대표는 과거 유명했던 커피 전문점 자리를 인수한 뒤, 전 주인이 암실로 쓰던 안쪽 공간을 주방으로 개조하고 전면 구조는 살렸다. 40년 된 낡은 양옥에 청주 출신 화가 윤형근의 색채에서 영감을 받아 옻칠을 한 한지 문살로 고전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뒷마당에는 길고양이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밥을 먹고,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는 풍경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메뉴는 상시 메뉴와 계절 메뉴로 나눠 선보인다. 인절미를 밥알이 보이지 않게 길게 늘인 뒤 얇게 썬 달걀지단과 실고추로 장식한 화병은 <반찬등속>에 소개된 조리법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시그너처 메뉴다. 떡에 달걀채와 고추채가 들어가는 구성에 대해 강 대표는 “처음엔 정말 ‘이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어요. 왜 이런 음식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달걀지단을 부칠 때 들어간 기름이 주는 느끼함을 고추채가 잡아주는 조화로움을 직접 체감했고, 부엌에서 끊임없이 무늬와 색을 응용했던 여성들의 탐구 정신을 읽어냈다. 그는 “부엌에서 또 하나의 실험과 발전이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이름의 의미 역시 지단을 써는 ‘과정이 힘들어 화가 난다’는 강 대표만의 위트 있는 추측을 거쳐, 다른 옛 문헌을 통해 꽃 화(花) 자를 썼을 가능성을 찾아냈다. 상시 메뉴인 궁중 두텁떡 역시 간장과 꿀로 간을 한 떡가루에 호두, 대추, 밤, 잣 등의 소를 채워 옛 맛을 그대로 살려낸다.
계절 메뉴로는 제철 과일을 멥쌀과 가볍게 섞어 찌는 버무리 형태의 설기를 선보인다. 과거 어머니가 쑥설기나 콩설기를 해주셨던 기억을 바탕으로, 초여름에는 옥수수철에 맞춰 초당옥수수설기를 내놓는다. “계절을 즐길 수 있는 재료가 막 나왔을 때 가볍게 해 먹는 음식이에요. 지난해 초당옥수수설기를 선보였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과거부터 쌀가루에 과즙을 입혀 말려두었다가 겨울에도 과일 설기를 해 먹었던 선조들의 방식을 메뉴에 담아낸다.
음료 역시 고서의 맥락을 충실히 따른다. 꿀물에 곶감을 띄우던 옛 방식에서 생강과 계피가 추가된 형태로 변화한 수정과나 식혜, 오미자화채 등이다. 특히 곶감채가 들어간 수정과는 얼음을 갈아 시원한 식감을 더해 제공한다. “식혜와 수정과는 옛 조리법과 더불어 어머니가 해주셨던 방식을 그대로 계승해 메뉴로 정착했어요. 1913년이라는 배경이 서양 문물과 전통이 교차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해 당시 양탕국이라 불렸던 커피와 여러 나라의 잎차들을 갖춰 한과와 먹기 좋게 조합했죠.”
강 대표는 전통은 그 시대의 삶과 기술이 자연스럽게 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백설기를 만들 때 우유를 넣는다고 떡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음식은 사람의 삶을 따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라며 전통을 과거가 아닌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한다. 앞으로도 그는 자신이 구축한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고조리서를 현대적으로 번역해나가는 동시에, 청주와 충청도 지역 어르신들의 조리법을 발굴하고 꼼꼼히 기록하는 작업에 매진할 예정이다.



식혜
재료
멥쌀 1kg, 엿기름 500g, 설탕 100g (입맛에 따라 조절), 생강 8g, 물 60L
만드는 법
1 엿기름을 미지근한 물에 담가 한 시간가량 불린다. 물은 전체 분량 60L에서 덜어 쓴다.
2 불린 엿기름을 고운체에 거른다.
3 거른 엿기름에 나머지 물 분량 중 일부를 부어 다시 고운체에 거른다. 나머지 물을 모두 부어 다시 고운체에 거른다.
4 거른 엿기름은 버리고, 내린 엿기름물만 모아 3시간가량 그대로 두어 가라앉힌다.
5 멥쌀로 고두밥을 짓는다. 밥이 다 되면 약 50℃까지 식힌다.
6 가라앉힌 엿기름물의 맑은 웃물만 따라 밥에 붓고 잘 섞어준다.
7 6의 밥을 전기밥솥에 넣고 보온 상태로 4~5시간 이상 당화한다.
8 4~5시간 후에 밥알의 일부가 둥둥 뜨고, 밥풀을 손가락으로 비벼봤을 때 한 줄로 뭉쳐지면 다 된 것이다.
9 그대로 전기밥솥의 취사 기능을 이용해 뚜껑을 열고 생강과 설탕을 넣고 끓인다. 당화가 잘되면 설탕은 아주 소량만 넣어도 된다.
10 밥풀을 거른다. 밥풀을 식혜에 넣어 먹고 싶으면 찬물에 헹궈 따로 보관했다가 먹을 때 넣는다.
초당옥수수설기
재료
초당옥수수 3개, 습식 멥쌀가루 400g, 소금 4g, 설탕 40g
만드는 법
1 습식 멥쌀가루에 소금과 물 80ml 정도 넣어 고루 섞어 체에 내린 다음 설탕을 섞는다.
2 초당옥수수는 껍질과 수염을 떼고 물로 한번 가볍게 씻은 후 마른 행주로 닦아 물기를 제거한다.
3 초당옥수수를 알 위주로 칼로 저미듯 돌려가며 자른다.
4 멥쌀가루에 초당옥수수 알을 고루 섞은 후, 찜기에 꼭 짠 면포를 깔고 올린다.
5 끓는 물에 찜기를 올려 20분 정도 강불에서 찐다. 다 쪘으면 5분 정도 뜸을 들인다.
6 큰 그릇에 쏟아 가볍게 고루 섞는다.

화병
재료
습식 찹쌀가루 500g, 소금 5g, 달걀 12개, 청태 가루 적당량, 실고추 적당량
만드는 법
1 습식 찹쌀가루(물에 담갔다가 빻은 찹쌀가루, 방앗간이나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다)에 소금과 물 100ml 정도 넣어 고루 섞은 후 체에 내린다.
2 끓어오르는 찜기에 꼭 짠 면포를 깔고 찹쌀가루를 올린다.
3 강불에서 20~25분가량 찐다.
4 찐 찹쌀가루를 절구에 쏟아 방망이로 세게 치댄 다음, 네모난 틀에 쏟아 모양을 잡아가며 식힌다.
5 달걀을 노른자와 흰자로 나누어 소금과 흰 후추를 넣고 잘 풀어 각각 지단을 얇게 부친 다음 곱게 채 썬다.
6 식은 떡을 인절미 크기로 썬 다음 달걀채를 묻힌다.
7 떡을 그릇에 담고 청태 가루를 뿌린 다음 실고추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