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arl District
펄 디스트릭트


포틀랜드의 얼굴
‘alternative.’ 포틀랜드에 머무는 내내 만난 사람들이 이 도시를 설명하며 가장 많이 쓴 형용사가 바로 얼터너티브, ‘대안적인’이었다. 첫날 아침, 펄 디스트릭트 도보 투어를 가이드해준 캘리는 휴대폰 대신 텀블러를 손에 쥐고, 요란한 무지개색으로 꾸민 자전거를 타고 왔다. 14년 전 남편과 이곳에 정착했다는 그녀는 최근 오픈한 리츠칼튼 호텔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스타벅스는 가지 말라며 더 좋은 카페들을 추천했다. 포틀랜드를 여행하는 내내 캘리와 비슷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좋건 나쁘건, 맛있건 맛없건, 누군가가 만든 길을 좇기보다 자신만의 것을 이룬 이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바로 포틀랜드의 중심, 다운타운 코어와 펄 디스트릭트다. 캘리는 낡은 벽돌 창고가 늘어선 펄 디스트릭트 쪽으로 걸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버려진 벽돌 창고를 허무는 대신 마이크로 브루어리와 갤러리로 용도를 바꾼 곳이 많아요. 획일화된 도시 개발을 거부하는 대안적 공간들이죠.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그런 곳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테니 기대하세요.”
캘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짐을 푼 곳은 다운타운 코어에 위치한 히스먼 호텔(Heathman Hotel)이었는데, 포틀랜드에 있는 동안 호텔 1층의 초콜릿 가게 아자르 인덜전스(Azar Indulgences)를 참새 방앗간처럼 들렀다. 레바논 출신의 크리스틴 아자르(Christine Azar)가 2015년 론칭한 이곳은, 가문에서 100년 넘게 이어온 초콜릿 제조 방식을 포틀랜드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문을 열었다. 에스프레소 1샷과 진한 초콜릿 1샷을 섞어 만든 ‘샷 앤 샷’은 피곤한 아침에서 깨어나기에 가장 좋은 음료였다. 단숨에 잔을 비운 나는 “시유 투모로우”를 4일 내내 아침마다 외쳤다.


둘째 날 아침, 호텔 바로 뒤에 있는 셰먼스키 공원(Shemanski Park)으로 서둘러 향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파머스 마켓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농부들은 중간 유통을 거치지 않고 농장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을 마켓에 가져와 판매한다. 사람들은 싱싱한 딸기와 갓 구운 빵, 트럭 안을 가득 채운 화덕에서 나오는 뜨끈한 피자를 사 들고 벤치에 앉아 맛보고 있었다.
“셰먼스키 공원에서 식사를 했으면 바로 옆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Portland Art Museum)에 꼭 가보세요. 포틀랜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장소 중 하나거든요.” 관광청 직원 실비아의 조언을 따라 미술관으로 향했다. 1892년 문을 연 이곳은 지난해 11월 대대적인 리뉴얼을 통해 유리 건물 로스코 퍼빌리언(Rothko Pavilion)을 새로 지었다. 기존의 미술관 건물과 넓게 이어져 있는데, 내부에는 최근 별세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시는 북미에서 열린 호크니 전시 중 역대 최대 규모로, 60년에 걸친 그의 작품 200점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바로 옆 비하인드 더 뮤지엄 카페(Behind The Museum Cafe)에 앉아, 눈에 가득 찼던 낯선 작품의 잔상을 차분히 떠올렸다. 카페 안에서도 미술관 입구에 자리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의 작품 <태양(The Sun)>이 한눈에 들어왔다.


펄 디스트릭트 안쪽으로 들어서면 개성 넘치는 작은 숍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메이드 히어(Made Here)는 지역 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파는데, 이 도시 사람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한눈에 구경하기 좋다. 카누(Canoe)는 쓰임새가 좋고 감도 높은 물건을 모아둔 라이프스타일 숍이다. 곁에 오래 두고 써도 질리지 않는 필기구와 라이프스타일 제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틀랜드엔 지역 식재료를 색다르게 해석하는 대안적 식당도 많죠.” 실비아의 이 말도 실감했다. 대표적인 곳이 최근 오픈한 릴리아 코메도르(Lilia Comedor) 레스토랑이다. 포틀랜드 주변 포레스트 그로브 지역에서 직접 가져온 마른 고추와 콩 등 지역 재료를 요리에 그대로 담아낸다. 지금 포틀랜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카페 중 하나인 마코 맛차 밀(Mako Matcha Mill)에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곳은 매장 안에서 직접 맷돌로 찻잎을 간다. 음료 한 잔을 만들기 위해 무거운 돌을 돌리는 모습을 직접 보자니 기다리는 시간조차 재미있다. 건강한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 뒤로, 그라피티로 벽을 채우고 있는 예술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매달 첫째 주 목요일은 포틀랜드의 예술 신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날이다. 1986년부터 이어진 거리 예술 축제, 퍼스트 서스데이(First Thursday)를 운 좋게 구경할 수 있었다. 저녁 5시부터 밤 9시까지 펄 디스트릭트의 갤러리들이 문을 열고 관람객을 맞이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자동차 진입을 막은 13번가 도로 위다. 150명이 넘는 동네 예술가들이 저마다 작은 천막을 치고 작품을 늘어놓는다. 행위예술부터 그라피티, 직접 빚은 도자기, 손으로 깎은 나무 장난감, 알록달록한 그림 등 형태와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예술이 한데 모였다. 길 한구석에서는 시민들이 흰 옷을 입은 예술가에게 물감을 뿌리고, 다른 쪽에는 외발자전거를 탄 악사가 불을 뿜는 악기를 연주하며 지나간다. 펄 디스트릭트와 다운타운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말했던 ‘대안(alternative)’이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됐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을 택하고 표현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마음껏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풍경. 포틀랜드를 미국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는 힘을 목격했다.
Slabtown & Nob Hill
슬랩타운&놉힐



포틀랜드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
포틀랜드 북서쪽의 슬랩타운(Slabtown)과 놉힐(Nob Hill)은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다. 과거 슬랩타운 일대는 제재소가 뿜어내는 연기와 버려진 나무껍질(slab)이 널려 있는 거친 공장 지대였다. 반면 바로 옆 놉힐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 이름을 따서 지을 만큼, 크고 화려한 빅토리아 양식 저택들이 모여 있는 부유한 동네였다. 시간이 흐르며 두 구역의 뚜렷했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거대한 공장과 창고들은 세련된 아파트와 식당으로 모습을 바꿨고, 100년이 넘은 주택들은 원래의 뼈대를 유지한 채 상점과 카페로 쓰이고 있다.
슬랩타운에서 걷기 시작하면 널찍한 보도블록 위로 요가 매트를 들고 지나가거나 잘 관리된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바쁘고 북적이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이곳에선 시간이 한 박자씩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주민들은 큼직하고 투박한 옛 건물을 개조한 공간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거리 곳곳의 대형 유기농 식료품점 앞에 자전거를 세워둔 채 느긋하게 장을 본다.
슬랩타운을 지나 노스웨스트 21번가와 23번가로 접어들면 풍경은 한층 우아해진다. 아름드리 가로수가 짙은 그늘을 만드는 길에 들어서니 교차로의 도로 표지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번사이드(Burnside), 카우치(Couch), 데이비스(Davis), 에버렛(Everett), 플랜더스(Flanders) 등 길 이름이 알파벳 순서대로 나타났다. 1800년대 후반 도시를 개발하며 붙인 도로 이름으로, 포틀랜드 사람들은 이곳을 ‘알파벳 스트리트’라고 부른다.
이 지역의 기품 있는 매력은 노스웨스트 23번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인다. 예전 부유층들이 살던 화려한 빅토리아풍 목조주택들이 길 양옆으로 고풍스럽게 늘어서 있다. 앞마당과 현관에 있던 넓은 나무 덱은 감각적인 디자이너 부티크나 라이프스타일 숍의 입구가 되었고, 널찍한 거실은 예술 작품이나 고급 소품을 진열하는 쇼룸으로 쓰인다. 화려한 대형 간판으로 시선을 끌기보다는 오래된 건축물의 고유한 멋을 해치지 않고 스며든 점이 이 동네만의 수준 높은 취향을 보여준다.
어느새 1920년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독립영화관 시네마 21(Cinema 21)의 빈티지한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낡은 집을 고쳐 만든 뉴 르네상스 북숍(New Renaissance Bookshop)도 눈에 띈다. 명상 서적과 수정, 향 등을 다루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비로운 향기와 함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이 여유로운 골목에서도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바로 솔트 앤 스트로(Salt & Straw) 앞이다. 계절 식재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맛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고, 갓 구운 와플 콘 냄새가 거리를 채운다. 책 한 권을 펴놓고 조용히 오후의 커피를 즐기거나, 이웃과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이들에게서 포틀랜드 특유의 느긋함이 묻어난다.
Alberta Arts District
앨버타 예술 지구



역사 위에 쌓아올린 예술
동쪽에 자리한 앨버타 예술 지구로 향했다. 포틀랜드 예술의 중심지이자,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인 만큼 투어 가이드와 함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만난 가이드 앨리스는 거리를 걷기 전, 이 동네가 지나온 굴곡진 역사부터 꺼내놓았다.
“이 일대는 1800년대 후반만 해도 포틀랜드와 분리된 알비나(Albina)라는 독립된 도시였어요. 1903년에 포틀랜드에 합쳐진 후 전차가 다니며 꽤 번성했죠.” 앨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1948년 인근 밴포트(Vanport)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1만 8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집을 잃은 이들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당시 부동산 업자들은 흑인들이 집을 살 수 있는 구역을 빨간 선으로 그어 제한하는 ‘레드라인’ 정책을 썼어요.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이 앨버타로 밀려 들어왔죠.” 이후 고속도로가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길거리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위험한 우범 지대로 전락했다.
이 삭막한 골목을 지금의 예술적 거리로 바꾼 시작은 한 여성으로부터다. 앨리스는 한 건물을 가리키며 당시 ‘앨버타의 여왕’이라 불리던 흑인 여성 로잘린 힐(Rosalyn Hill)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거리의 건물을 사들인 뒤 상인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걸고 공간을 내주었어요. 범죄를 막기 위해 창문에 쳐두었던 철창을 모두 떼어낼 것, 그리고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게 규칙적인 시간에 문을 열어 거리를 밝힐 것. 이 두 가지였죠.” 앨리스의 설명을 듣고 나니, 거리를 채운 벽화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과거 밴포트 홍수 때 차를 타고 도망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 철거된 흑인 교육 센터 건물에 그려져 있던 맬컴 엑스(Malcolm X) 벽화를 기억해 새로 그린 그림 등이 거리를 채웠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티스트 셀림(Selim)이 그린 퍼즐 조각 모양의 그림들과 원주민 아티스트가 그린 깃털 벽화도 찾아볼 수 있다. “거리가 유명해지면서 원래 살던 흑인들이 다시 밀려나는 것을 막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거리 곳곳에 역사적 사실을 적은 작은 팻말을 세워두었어요.” 앨리스가 길가의 작은 표식을 짚으며 덧붙였다.
가이드 투어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거리의 상점을 둘러봤다. 저마다 확실한 개성과 지역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가진 공간들이 촘촘히 이어진다.
무엇보다 서점의 형태가 흥미로웠다. 거대한 서점보다는 특정 분야만 깊게 파고드는 마이크로 스페셜리스트 서점들이 거리를 따라 흩어져 있다. 어린이 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그린 빈 북스(Green Bean Books), 공포 소설과 판타지에 집중하는 패럴렐 월즈 북숍(Parallel Worlds Bookshop), 요리 서적만 취급하는 비비엔 컬리너리 북스(Vivienne Culinary Books)가 대표적이다. “파월스 북스가 한 건물에 모든 장르의 책을 모아두었다면, 앨버타 예술 지구는 거리 그 자체가 거대한 서점인 셈이죠.” 앨리스의 말이 생각났다. 앨버타 예술 지구는 상처 위에 선명한 그림을 그리고 예술로 지역의 문화를 단단하게 빚어내고 있었다.
Willamette Eastfront
윌래밋 강변



거친 산업지구와 일상의 공존
포틀랜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윌래밋강 동쪽은 도시의 상징적인 풍경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강에는 총 12개의 다리가 있는데, 저마다 다른 쓰임새와 독특한 모양을 가졌다. 포틀랜드를 ‘다리의 도시(Bridgetown)’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층 구조로 기차와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스틸 브리지(Steel Bridge), 보행자와 자전거, 대중교통의 통행만 허용한 틸리쿰 크로싱(Tilikum Crossing), 배가 지나갈 때 묵직한 철제 상판을 수직으로 들어 올리는 짙은 초록색의 호손 브리지(Hawthorne Bridge) 등이 대표적이다.
강 동쪽 둔치를 걷다 보면 거친 산업의 흔적과 활기찬 일상이 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마주한다. 갑자기 울리는 굉음과 경적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화물 기차가 눈앞의 철길을 가로지른다. 수십 개의 화물칸을 매단 기차가 뿜어내는 묵직한 소음은 윌래밋 강변 일대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산업도시임을 생생히 실감케 했다. 기차가 지나가기를 한참 동안(무려 10분이 넘도록!) 기다리는 경험도,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을 구경하는 시간도, 윌래밋 강변 구간에서만 가능하다.
거칠고 투박한 풍경 사이사이에도 포틀랜드 특유의 창의적인 기운이 스며 있다. 화재로 뼈대만 남았던 테일러 일렉트릭 빌딩(Taylor Electric Building)이 좋은 예다. 까맣게 그을린 외벽 전체가 지역 아티스트들의 거대한 캔버스가 된 이 건물은 삭막한 공장지대 골목에 강렬한 색감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남쪽으로 향하면 오래된 주거 지역, 셀우드(Sellwood)로 들어선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사이, 현지인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로컬 숍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눈에 띄는 대형 매장 스타스 앤티크 몰(Stars Antiques Mall)은 이 동네의 분위기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웃들이 쓰다 내놓은 낡은 식기와 빈티지 가구가 공간을 채우고 있어, 포틀랜드 사람들의 오랜 취향을 깊이 있게 탐색할 수 있다. 가게를 나와 쉴 곳을 찾는다면 커피 대신 잎차를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이드 티하우스(Jade Teahouse)와 포털 티 컴퍼니(Portal Tea Company)처럼 질 좋은 차를 전문으로 다루는 찻집이 동네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이 되니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씩 셀우드의 터줏대감격인 이탈리아 식당 지노스(Gino’s)로 모여들었다.
육중한 화물 기차가 지나는 거친 산업지대와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공존하는 셀우드의 골목. 윌래밋강을 따라 걸으며 포틀랜드의 여러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SE Culture Belt
사우스이스트의 두 거리




벨몬트&호손 스트리트
포틀랜드의 노스탤지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동네를 찾는다면 도시의 남동쪽(Southeast)으로 향하자. 1900년대 초반 노면 전차가 오가던 흔적을 따라 나란히 뻗은 벨몬트(Belmont)와 호손(Hawthorne) 거리는 낡고 오래된 것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벨몬트 스트리트에는 조용한 주택가 사이사이로 빈티지한 감각이 살아 있는 상점들이 자리한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패션 아이템과 팝 컬처 소품을 선별 판매하는 매장 플래닛 엑스 빈티지(Planet X Vintage)는 이 거리 특유의 복고적인 정서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의 가정집에 놀러 가듯 문을 열고 들어선 독립 서점 벨몬트 북스(Belmont Books)에선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로컬 작가들의 출판물과 소규모 잡지를 뒤적일 수 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면 무비 매드니스(Movie Madness)에 도착한다. 8만여 편의 희귀 비디오테이프와 DVD가 빽빽한 이곳은 단순한 대여점을 넘어 작은 영화 박물관을 방불케한다. 매장을 거닐며 실제 영화 촬영에 쓰였던 소품과 의상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영화광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벨몬트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손으로 넘어가는 블록은 포틀랜드의 오래된 동네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널찍한 현관을 품은 낡은 목조주택들과 그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굵직한 가로수들이 길게 이어진다. 동네 주민들이 반려견과 함께 느릿느릿 지나가고, 누군가는 현관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풍경 속에 스며들어 걸었다.
벨몬트가 특정 품목을 깊게 파고드는 소규모 독립 상점들이 흩어진 곳이라면, 호손은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유산을 바탕으로 형성된 좀 더 큰 규모의 빈티지 거리다. 크로스로즈 트레이딩(Crossroads Trading)에는 일상에서 곧바로 활용하기 좋은 세컨드 핸드 의류가 꼼꼼하게 선별되어 있다. 하우스 오브 빈티지(House of Vintage)는 600평이 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1920년대 의류부터 1990년대 낡은 밴드 티셔츠, 손때 묻은 타자기와 빛바랜 엽서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물건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다. 구역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양손이 묵직해진다. 길 끝자락에 자리한 골드 도어 주얼리 앤 아츠(Gold Door Jewelry & Arts)에는 타로 카드와 멕시코 전통 공예품, 동물의 뼈로 만든 장식품 등 전 세계에서 수집한 독특한 물건이 가득하다.
오래된 취향을 다루는 골목 벨몬트와 호손 거리. 주택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뻗은 두 거리는 포틀랜드 남동쪽이 품고 있는 노스탤지어를 선명하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