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리아나 제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적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1944년 사이판 전투 당시의 흔적을 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일본군과 민간인이 패전 직전 뛰어내렸다는 만세절벽, 자살절벽을 비롯해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동굴 요새 최후 사령부 등이 바로 그것이다.
RUNNING Garapan, Saipan


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글쓰기가 아닌 달리기를 배웠다. 그의 러닝 철학이 집약된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리기 혹은 인생의 지침서가 되어준 덕분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 어떤 것과도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고 달렸다는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가 비석에도 새기고 싶다는 이 문장은 내 첫 사이판 마라톤의 출발선이 되었다. 매년 3월 사이판은 러너들의 도시가 되는데, 이는 사이판 마라톤(Saipan Marathon)이 열리는 덕분이다. 국제 공인 마라톤인 이 대회 참가를 위해 사이판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긴장을 풀기 위해 ‘셰이크아웃 런(Shakeout Run)’으로 하루를 연다. 가벼운 조깅으로 몸을 깨우고 다른 러너들과 페이스를 맞추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시간이다. 이번 사이판 마라톤에는 한국인 참가자가 37%에 달하는 만큼, 낯선 길 위에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달리니 금세 자신감이 생긴다. 사이판 최대 번화가인 가라판(Garapan)을 관통해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American Memorial Park)*1를 지나 엘로이 S. 이노스 피스 공원(Eloy S. Inos Peace Park, 이하 피스 공원)*2으로 향하는 코스는 로컬에게도 사랑받는 최적의 주로. 사이판을 상징하는 불꽃나무와 코코넛나무가 줄지어 선 거리를 지나 한때 매립지였던 피스 공원의 언덕을 오르면, 청량하고 시린 푸른 바다가 시야에 가득 찬다. 사이판에 도착했다는 실감 때문인지, 마라톤의 압박감 때문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다.
대회 날 새벽*3, 비장한 각오로 수백 명의 러너들과 출발선 앞에 선다. 저마다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코스튬을 갖춰 입은 채 레이스를 페스티벌처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긴장감은 이내 설렘으로 바뀐다. 비치 로드를 달리는 내내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과 지지가 이어진다. 마라톤은 달리기에 대한 도시의 애정이 전제돼야만 가능한 축제가 아니던가. 반나절 동안 도로를 비워주는 배려, 대회가 끝난 후 거리를 청소하는 수고 모두 주민들의 관용이 필요한 법이니까. 반환점 너머 호흡이 엉켜 두통이 밀려오는 고비가 찾아왔지만, 결승선에 다다를수록 선명해지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는 느려지던 발걸음을 끝내 완주로 이끈다. 기록이야 어찌 됐든, 지면에 꼭 옮기고 싶었던 문장을 빌려온 것만으로 나의 첫 마라톤은 성공적이다. 사이판의 빛나는 해안 도로 위에서 나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1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대규모 공원. 넓은 녹지, 해변, 전쟁 기념 시설 등으로 구성됐다.
*2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부지가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 사이판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며 일몰 명소로도 유명하다.
*3 사이판의 오후는 매우 뜨겁기 때문에 마라톤 대회가 오전 4시부터 시작하곤 한다.
DIVING The Grotto, Saipan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 하나. 내 왼팔 뒤쪽에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세 명의 소녀가 새겨져 있다. ‘벼랑 끝인 줄 알고 떨어져보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는 의미를 부여한 타투. 그 스토리텔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이곳 사이판에서 운명처럼 마주할 줄은 몰랐다. 세계적 다이빙 명소이자 자연이 빚은 신비로운 석굴 그로토(The Grotto)가 그 주인공이다.
가파른 경사의 계단 100여 개를 따라 숨 가쁘게 내려가자, 마침내 그로토가 그 압도적 자태를 드러낸다. 그로토는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에서 유래한 단어로, 햇빛이 수중 통로를 통해 굴절되어 들어오며 비현실적인 푸른빛을 내뿜는 해식동굴을 뜻한다. 세계에서 이름난 그로토들이 대개 눈으로만 담아야 하는 ‘성소’라면, 사이판의 그로토는 누구나 뛰어들어 즐길 수 있는 ‘놀이터’에 가깝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가이드 세호가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거침없이 타고 오른다. 긴장한 여행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또 다른 가이드 미나가 한마디 거든다. “걱정 마세요. 여긴 저 친구들 놀이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호가 세 개의 동굴 사이, 푸른 심연을 향해 맨몸을 던진다. 그가 빠진 자리 위로 하얀 포말이 부서지고, 밤하늘처럼 짙은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제 내 차례다. 그로토 품에 안기기 위해선 마지막 단계를 거쳐야 한다.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물살이 잦아들길 기다려 좁은 바위틈을 건너고서야 비로소 다이빙대 역할을 하는 평평한 암반 위에 설 수 있다. 발밑으로 수심 21m의 해저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찰나, 이 역동적인 동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준비가 끝났다. 용기를 내어 높이 2~3m의 암반에서 발을 구르자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진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위 사이사이 보석처럼 박힌 산호도, 섬광처럼 빛나는 열대어도, 나보다 더 깊은 수중을 탐험하는 다이버들의 유영조차 아니다. 세 개의 동굴 입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의 기둥들. 그 빛에 산란하며 형광색으로 타오르는 바닷물을 마주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곳이 바로 내 왼팔에 새겨진, 낙하 끝에 마주한 다른 세상임을.
ISLAND HOPPING Managaha Island




사이판에서 배로 약 15분이면 닿는 아주 작은 무인도 마나가하섬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섬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거나, 섬 주변의 수중 세계를 유영하거나. 만약 전자를 택한다면 최근 그 여정이 더욱 편리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지난 2월, 마이크로 비치(Micro Beach)가 내려다보이는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가 마나가하섬을 대대적으로 리뉴얼한 덕분이다. 식당과 렌털 숍, 샤워 시설은 말끔한 새 옷을 입은 채 여행자를 맞이하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파라솔은 더 깊고 넓은 그늘을 내어준다. 현재 가라판 시내 근처 찰리 독(Charlie Dock) 선착장에서 스피드 보트를 이용하는 것이 섬에 닿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오는 5월 리조트 앞 마이크로 비치에서 섬으로 직행하는 배편이 생길 예정이다.
찰리 독에서 출발한 스피드 보트가 북태평양 물살을 가르며 마나가하섬에 다다른다. 야생동물만이 이 섬의 주인임을 선언하듯, 섬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생동감이 넘친다. 발아래로는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군무를 추고 머리 위로는 오렌지빛 가슴을 뽐내는 물총새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다닌다. “마나가하섬의 진짜 매력은 섬 뒤편에 있어요.” 가이드 세호의 말에 취재팀이 섬 뒤편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앞쪽보다 물살이 거칠어 가이드의 리드가 필요한 구간이다. 세호의 신호에 맞춰 수면 아래로 시선을 던지자 방금까지 몸을 흔들던 파도의 기세가 무색할 만큼 평온한 세상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지갯빛 비늘의 트리거피시(Triggerfish). 산호를 물어뜯는 강한 이빨을 가졌으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외형이 피카소의 화풍을 닮아 피카소 트리거피시라 불리는 물고기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놓치지 말자.
마나가하섬을 둘러싼 신비로운 바다를 유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3년 동안 온 가족과 전 세계의 바다를 누리다 이곳에 정착했다는 트래블리즈(Travelees) 이우석 대표의 요트에 오르는 것이다. 해가 수평선에 닿기 직전, 섬 근처에 닻을 내리면 바다는 거대한 놀이터가 된다. 투명 카약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거나 스노클링 장비를 갖추고 산호의 서식지로 뛰어드는 액티비티가 이어진다. 요트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이 대표가 정성껏 차려낸 차모르 전통 식탁이다. 코코넛 랍스터와 차모르식 소시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참치 다다키와 포케까지. 사이판의 자연이 허락한 호사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수면 위로는 황홀한 노을이, 수면 아래로는 아득한 심연이 교차하는 마법 같은 찰나다.
*차모르족이 즐겨 먹는 초리소(chorizo) 스타일의 소시지로, 훈제 향과 약간의 산미가 감도는 것이 특징이다.
ADVENTURE Rota Island




(우)로타섬으로 가는 소형 비행기 안. 현재 사이판에서 하루 3회 정도 운항 중인데, 오브리 시장은 항공편을 증편하고 빠른 시일 내에 페리를 운항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북마리아나 제도에서는 바다 이름이 다르듯, 그 색을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이를테면 그로토의 ‘그로토 블루’와 로타섬의 ‘로타 블루’가 그렇다. 그저 푸르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농도의 차이가 지명 뒤에 고유명사처럼 붙어 다닌다. 이 특별한 로타 블루의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사이판에서 출발한 소형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약 30분. 창밖으로 ‘사이판의 보석’이라 불리는 로타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라곤 짙푸른 원시림과 코발트색 안료를 흩뿌린 듯한 바다뿐이다. 문명의 흔적 하나 없이 완벽하게 고립된 그 순수한 풍경은 낯선 행성에 도착한 듯 생경함과 묘한 두려움을 동시에 자아낸다.
취재팀을 마중 나온 로타 관광청 직원 데이비드의 안내로 로타 블루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섬 어디에서나 맑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지만, 야생 조류 보호구역 버드 생추어리(Bird Sanctuary)는 비행기에서 본 야생의 얼굴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밀림 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를 지나 전망대 끝에 서면, 원시림과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비경이 발밑으로 쏟아진다. 로타의 심장부라 불리는 송송 빌리지(Songsong Village)의 전망대를 지나, 이제 그 색의 한복판에 몸을 던질 차례. 해안 암벽이 성벽처럼 파도를 막아 세운 스위밍 홀(Swimming Hole)은 호수처럼 잔잔한 천연 수영장이다. 순백의 모래와 햇살이 만든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는 기꺼이 몸을 던지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그 손짓을 거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로타가 내민 환대에 응하는 가장 완벽한 방식이니까.
“로타에서 차모르 문화와 음식을 꼭 경험했으면 해요. 로타 사람들은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반드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자연을 착취 대상이 아닌 조상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여기곤 하죠.” 취재팀을 만난 로타 시장 오브리(Aubry Manglona Hocog)의 조언대로 코코넛 크랩(Ayuyu)를 맛보기로 한다. 코코넛을 먹고 자라 귀한 풍미를 자랑하는 크랩 요리는 코코넛 밀크를 넣어 조리는 시간만 반나절이 걸리는데, 차모르 사람들이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내놓는 환대와 정성의 상징이다. 크랩의 살점에서는 은은한 단맛이 배어 나오고, 진액이 녹아든 코코넛 밀크는 입안 가득 농밀한 풍미를 터뜨린다. 이토록 풍요로운 식탁의 이면에는 로타 사람들이 지켜온 오랜 철학이 깃들어 있다. 필요한 만큼 취하고 나머지는 자연의 몫으로 남겨두는 전통. 그 마음이 있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도, 현대화의 물결도 비껴간 채 가장 야생다운 야생을 간직할 수 있었으리라.
DINING in Saipan

아메리칸 피자 앤 그릴
미국의 어느 활기찬 다이너를 옮겨놓은 듯한 식당으로, 가라판 시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다. 갓 구운 피자와 육즙 가득한 햄버거, 정통 스테이크까지 미국식 다이닝의 정수를 담은 다채로운 메뉴 덕분에 세대 불문 온 가족이 기분 좋은 미식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이나스 키친
하루 딱 4시간만 문을 여는 수제 버거 맛집. 쫄깃한 번과 두툼한 패티, 짭조름한 치즈의 완벽한 균형이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다. 레몬과 바닐라 향이 감도는 이색적인 비슈 프라이즈(Bishu Fries)는 물론 고구마 맛이 좋기로 유명한 사이판산 고구마 프라이즈도 놓쳐선 안 될 메뉴다.

허먼스 모던 베이커리
1944년부터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북마리나아 제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베이커리. 오븐에서 갓 구워낸 빵은 1990년대 미국의 정직하고 투박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 식사 메뉴도 있는데, 그중 소시지와 볶음밥, 달걀프라이가 한데 모인 소박한 차모르 전통 조식은 여행자의 아침을 깨우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