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구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 간판 하나 없이 숨어 있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찾아가는 길은 그 자체로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 굴을 찾아가는 모험을 닮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부의 소음은 온데간데없고, 따뜻한 오렌지빛 조명 아래 수천 권의 책이 뿜어내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포근하게 감싼다. 거실을 개조해 만든 서재 곳곳에는 주인장의 취향이 묻어나는 꽃병과 빈티지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리고 나직이 흐르는 바이닐 음악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헌책 컬렉터이자 <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 낙서 수집가> 등을 펴낸 윤성근 작가가 19년째 일구어온 중고 서점 겸 문화 공간이다.
“정식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지만 항상 별칭이 있었어요. 2007년 처음 책방을 열었을 때는 지하에 자리 잡았기에 ‘지하의 토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뒤 은평구로 옮겨 ‘앨리스의 다락방’이라는 2층 공간을 운영했고요. 지난 3월 이곳 마포에 새롭게 연 공간은 ‘모자 장수의 비밀 서재’로 이름 지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시작부터 간판을 만들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이곳을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신비로운 콘셉트가 되었죠.”
책방엔 윤 대표가 모은 전 세계 ‘앨리스’ 관련 수집본과 굿즈를 비롯해 빅토리아 시대의 고서가 주로 자리했다. 그의 수집 목록은 단순한 판본 수준을 넘어선다. 우선 각 나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책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나라마다 그림체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망가 스타일의 일본 앨리스, 성숙한 분위기의 스페인 앨리스, 슬라브족 여인의 모습을 한 러시아 앨리스, 고전적인 디즈니의 앨리스 등 각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앨리스 그림에 투영돼 있죠.”
이 외에도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장정한 판본이나 거장 구사마 야요이의 구상화가 담긴 책, 미국에서 발행된 텔레비전 형태의 팝업북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뮤지컬 카세트테이프까지, 앨리스라는 텍스트가 지닌 모든 물리적 형태가 이곳에 모여 있다. 심지어 실제 모델이었던 앨리스 리델의 결혼반지와 사진이 기록된 경매 자료집은 수집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그의 수집은 앨리스로부터 시작됐지만,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19세기 영국의 황금기로 확장되었다. 앨리스가 탄생한 1800년대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답게 문학적으로도 유례없는 풍요를 누렸다. 덕분에 서재의 다른 벽면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품은 귀한 고서들로 채워졌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초판본을 비롯해 역사소설의 대가 월터 스코트, 탐미주의의 정점에 선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당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안데르센의 동화집 등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특히 실제 금을 발라 마감한 덕에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부시게 빛나는 호화 장정본과 독자가 직접 종이칼로 페이지를 뜯어 읽어야 했던 수제본의 흔적은 그가 발견해온 아날로그 미학의 정수다.

진보초 고서점에서 찾은 보물들
윤 대표의 수집 세계는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서 보낸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님이 탄광 일을 하시던 시절, 소년 윤성근은 폐광의 컴컴한 굴 입구를 나무판자로 막아둔 경고문을 보며 그 너머에 펼쳐질 미지의 세계를 끊임없이 상상하곤 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용감한 친구들처럼 직접 굴 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손때가 묻도록 읽으며 토끼 굴을 따라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세계에 자신을 투영했다.
그의 수집 본능에 불을 지핀 것은 대학 시절 처음 접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서였다. IT 전공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책을 좋아하던 그였다. 우연히 접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서는 어린이용 동화와 달리 개연성 없는 이야기들이 분절적으로 이어지고, 전위적이고 복잡한 언어유희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당시 저는 1960~1970년대 프랑스 문학계의 파격적 양식이었던 ‘누보 로망(nouveau roman)’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앨리스의 형식이 그것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오히려 더욱 당시 문학에 빠져들었죠.” 결국 직장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닫고 출판사와 헌책방을 거쳐 2007년 자신의 서점을 열었다. 그는 이 ‘앨리스적’인 전위성에 매료되어 관련 책과 굿즈를 집요하게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보석 같은 수집품은 영국·독일·스페인·미국 등에서 모았지만, 주된 공급처는 일본 도쿄의 진보초(神保町) 고서점 거리다. 세계 최대 규모의 헌책방 거리인 이곳에는 과거 일본인들이 영국 문화를 동경한 덕분에 보존 상태가 뛰어난 영국 고서가 대거 유입되어 있다. 윤 대표는 고서 축제가 열리는 매년 5월과 10월 2주간 진보초를 하염없이 누비며 수집품을 찾는다.
“귀물을 발견했을 때 절대로 티를 내면 안 됩니다. 주인장이 수집가의 반응을 살피고 있기 때문이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무심한 척 책을 골라야 합리적인 가격에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거든요.” 이런 치열한 디깅 과정에서도 아픈 기억은 있다. 2019년 10월 헌책 축제에서였다. “작가가 평소 사용하던 보라색 펜으로 직접 사인한 루이스 캐럴의 친필 사인본 <스나크 사냥>을 발견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해요. 하지만 400만원이라는 가격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발길을 돌렸고, 며칠 뒤 다시 찾았을 땐 이미 누군가의 손에 쥐여진 뒤였죠. 지금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샀을 것 같아요. 손에 쥔 보물보다 놓친 것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죠.”

번쩍이는 황홀한 헌책방
윤성근 대표의 서재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서 제작된 의학 서적 시리즈다. 전 3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권당 약 300만원으로, 전체 가치는 무려 1000만원에 달하는 초고가 희귀본이다. 책에는 인체의 얼굴 가죽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근육과 혈관, 뇌와 뼈, 심지어 반으로 자른 위장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이 매우 정교한 천연색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 모든 삽화를 일일이 석판화로 찍어낸 덕분에 실제 본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교함이 특징이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독일어 장식체인 ‘프락투어(Fraktur)’로 인쇄된 이 기록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국립문자박물관의 한-독 수교 기념 전시에 대여되어 대중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윤성근 대표는 시외 창고의 방대한 장서를 끊임없이 교체하며 새로운 큐레이션을 선보인다. 최근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성, 젠더, 평등과 관련된 서적이 인기 있다. 그는 수천 권의 도서 중에서도 자신의 뿌리인 앨리스 컬렉션만큼은 절대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공간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단순한 지식 전달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 공간에서 뭔가 좋은 기분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성석제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이곳에서 일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서점을 가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