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 이 커피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Edited BY RYU JIN
  • writTen BY SHIM JAEBEOM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그 도시, 이 커피

The World in a Cup

커피와 카페는 이제 여행의 이유이자 목적이 됐다. 단 한 잔을 음미하는 것만으로 그 나라의 자연, 역사, 문화, 취향, 디자인, 건축, 미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누비며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 칼럼니스트가 된 심재범이 그 여정을 나눴다.
  • Edited BY RYU JIN
  • writTen BY SHIM JAEBEOM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2025년 01월 10일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커피 얘기부터 하고 싶다. 15년 전,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시차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고 일찌감치 호텔 밖으로 나선 그날 아침, 우연히 몬머스커피(Monmouth Coffee)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마신 푸어오버 커피 한 잔은 이후 나의 모든 여정을 커피로 물들였다. 런던 웨스트엔드 뒷골목의 작은 카페, 시카고 북부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버스를 놓쳐 네 시간을 도보로 이동했던 기억,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간 호주 시드니 근교의 뉴타운까지 온갖 에피소드로 점철된 내 커피 여행은 때론 무모하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되돌아보니 모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고 의미 깊은 순간이었다. 그 커피들은 내게 출장 많은 직장인이란 단편적인 삶 위에 커피 칼럼니스트, 바리스타, 세 권의 커피 책을 낸 작가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해줬다.

어떤 나라나 도시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기억하고 싶을 때 혹은 그 문화나 라이프스타일의 정수에 곧장 닿고 싶을 때 커피는 훌륭한 매개체가 되어준다. 어디를 여행하든 커피와 카페를 중요한 목적과 목적지로 삼는 커피 애호가들과 나의 지난 커피 자취를 나누고 싶다. 첫 번째로 짚고 싶은 커피 여행지는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선, 그 나라 사람들의 영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스프레소를 가장 먼저 찾아야 한다. 에스프레소는 7g의 커피 원두를 분쇄해 포터 필터에 담은 후 9기압의 압력으로 추출한 25ml 내외의 커피로 강렬한 질감과 임팩트를 갖는다. 이탈리아 사람들 혈관엔 피 대신 에스프레소가 흐른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들의 에스프레소 사랑은 각별하다. 이탈리아인 모두가 에스프레소로 묶이긴 하지만 지역마다 각기 다른 에스프레소를 사랑한다. 당신이 만약 피렌체를 포함한 북부를 여행할 예정이라면 북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우아하고 산뜻한 아라비카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그들의 취향에 다가가보라. 참고로 아라비카 품종 기반의 이탤리언 에스프레소는 섬세한 과일 향과 꽃향, 진득한 질감, 여운이 길게 남는 피니시로 지금 우리가 거의 매일 마시는 스페셜티 커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을 가득 품은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에선 로부스타 품종의 에스프레소를 마셔볼 것. 크레마와 질감이 강렬하다. 딱 한 잔만 마셔야 한다면 단연 로마 판테온 광장에 자리한 타짜도르(Tazza D’oro)다. ‘이탈리아의 (커피)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타짜도르는 진득하면서도 우아하고 깔끔한 피니시를 자랑한다. 관광객과 로컬이 뒤엉킨 에스프레소 바에서 이탈리아 사람처럼 설탕 한 스푼을 넣고 원샷으로 넘기면 농후한 맛과 향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이제 영국으로 건너갈 차례다. 이탤리언 에스프레소가 스타벅스를 통해 전 세계 프랜차이즈 카페의 모델이 되었다면, 전통을 비호하는 영국인들은 브루잉 커피로 블랙 커피의 역사를 계승한다. 브루잉 커피는 압력을 이용하는 에스프레소와 달리 커피와 뜨거운 물, 중력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커피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커피보단 홍차의 나라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하우스가 출현한 나라다. 17세기 영국에서 성행한 커피하우스는 1페니라는 소액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들어와서 커피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전하는 지식과 학문,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사교의 장이었다. 그래서 당시 영국 사람들은 커피하우스를 ‘페니 유니버시티’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국 최고의 브루잉 커피를 맛보고 싶다면 뮤지컬 극장이 몰려 있는 웨스트엔드에 자리한 몬머스커피로 향할 것. 진하고 달콤한 브루잉 커피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데 설탕을 넣지 않아도 원두의 농후한 풍미가 응축돼 단맛을 느낄 수 있다. 한 잔 더 마실 여력이 있다면 화이트 티(영국에선 밀크티를 화이트 티라고 부른다)처럼 따뜻한 우유를 넣어 즐겨보길 추천한다.

몬머스에 유명세를 안긴 커피 중엔 플랫 화이트도 있는데, 이 플랫 화이트의 원조는 바로 호주다. 남반구의 대표적인 낙농국답게 이 나라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밀크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플랫 화이트는 호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밀크 커피로, 우유 거품이 잔 위로 넘치지 않고 평평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국, 영국, 미국에선 2잔의 에스프레소 샷을 넣어 진하게 만들지만 호주에선 한 잔의 샷만 넣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플랫 화이트의 표준에 대해 커피인들 사이에선 호주식이 맞는지 영국식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호주에서 맛 좋은 커피를 찾는 커피인이 알아야 할 건 단 하나. 세계 최대 낙농국의 품질 높은 우유의 풍미를 깊게 느낄 수 있는 플랫 화이트 한 잔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커피는 시드니 ‘검션 바이 커피 알케미(Gumption by Coffee Alchemy)’의 싱글 오리진 플랫 화이트. 선명하고 강렬한 스페셜티 커피와 고소하고 달콤한 우유의 조합이 정말 완벽했다. 개인적으론 ‘적도 아래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로 꼽고 싶은 경험이다.

커피 여행을 논할 때 미국을 빼놓을 수 있을까? 아메리카노 말이다. 원래 아메리카노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잘 마시지 못하는 미국인들을 얕잡아 부르는 의미에서 시작한 명칭이었지만, 스타벅스의 등장과 함께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확산되면서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커피의 종류이자 장르가 됐다. 미국 커피, 즉 아메리카노의 매력은 다들 알다시피 맛이 강하고 쓴 에스프레소를 적절한 농도와 질감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아메리카노의 스탠더드를 꼽으라면 ‘블루보틀’이란 답을 내놓고 싶다. 미국의 스페셜티 커피 산업을 대표하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블루보틀은 양질의 커피를 상징하는 스페셜티 커피와 일본 특유의 환대 방식인 ‘오모테나시’를 합친 서비스 덕분에 빠른 속도로 세계 최대의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블루보틀을 즐길 수 있지만 ‘물’이 다른 미국 블루보틀의 아메리카노도 놓치지 말자. 꽃, 과일, 초콜릿, 캐러멜 등 다양한 향미가 조화를 이루는 원두의 맛을 적당한 농도로 즐겨볼 수 있는 기회다. 좀 더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메뉴에는 없는 ‘지브롤터 커피’를 주문해볼 것. 바리스타들이 근무 시간에 빠르게 마시기 위해 사식으로 만들어 먹었던 커피로 단골들이 하나둘씩 주문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핸드 드립 커피를 사랑한다면 치열한 직업 정신과 커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일본으로 향하자. 물론 우리나라도 전 세계 커피 신에서 고도화된 핸드 드립 커피로 유명하다. 스페셜티 커피 산업이 대중화되기 전, 생두의 품질이 높지 않았던 시절에 한국과 일본의 바리스타들은 원두의 맛과 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추출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 점드립, 융드립, 하리오, 고노와 같은 다채로운 방식과 도구가 탄생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나는 킷사텐(커피·홍차 등 음료나 가벼운 식사를 제공하는 찻집. 한국의 다방과 비슷하다)을 즐겨 찾는다. 옛 문화를 고스란히 품은 교토의 킷사텐, 프랑수아(Francois)는 2차세계대전 직전 반전운동을 주도한 지식인들이 교토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운영한 카페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운동의 거점이자 지식인들이 교류하던 살롱 같은 공간으로 항일 시절 시인 이상이 문 연 ‘제비 다방’과 꼭 닮은 공간이다. 고풍스러운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찻집에서 바리스타가 정성스럽게 내려주는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교토의 한 시절을 경험하는 일이 된다.

몸과 마음을 맑게 깨우는 커피 자체도 좋아하지만,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내는 카페를 찾는 여행도 사랑한다. 다음엔 어디에서 어떤 커피를 마실까? 이 질문에 당신 역시 설렌다면 자기만의 커피 여정을 만들어보길. 커피 여행이 당신을 예상치 못한 경험과 여정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제대로 알고 마시자, 세계의 커피

에스프레소
7g의 커피를 분쇄해 9기압의 압력으로 추출한 25ml 내외의 커피를 뜻하며 이탈리아에 가면 꼭 마셔봐야 한다. 피렌체를 포함한 북부의 에스프레소는 우아하고 청량감이 넘치고, 남부 나폴리의 에스프레소는 질감이 느껴지는 임팩트가 특징이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에 물을 부어 마시는 커피. 신선하게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희석한 커피로 통용되며, 시간이 지나면 맛이 떨어지는 브루잉 커피와 달리 오랜 시간 균형 있는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탄생시킨 커피다. 정통을 지향하는 커피 문화권에선 다소 낯선 커피였지만 지금은 미국 서부, 동남아, 프랑스 등에서 한류와 함께 유행하고 있다.

핸드 드립 커피
섬세한 드립 테크닉으로 원두의 맛을 끌어올리는 커피. 내리는 사람의 ‘손맛’이 풍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커피 문화로 점드립, 융드립, 고노드립 등 원두의 특색과 맛에 걸맞은 다양한 추출 방식을 즐겨볼 것.

콜드 브루
일본식 더치 커피가 원조로, 스페셜티 커피 산업 전문가들에 의해 콜드 브루 커피라는 장르로 발전했다. 일본식 더치 커피가 약 24시간 동안 찬물을 이용해 커피를 내리는 개념이라면, 콜드 브루는 6시간 내외의 추출 시간으로 커피의 향미를 자연스럽게 발현시킨다.

브루잉 커피
압력을 이용하는 에스프레소와 달리 뜨거운 물을 커피에 부어 내리는 전통적인 블랙 커피를 의미한다. 전체적인 질감이 진하지 않아서 블랙 커피로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우유를 넣어서 연하게 마시는 카페오레도 대중적이다.

플랫 화이트
호주의 자연·문화에 맞춰 현지화된 밀크 커피. 호주 출신의 바리스타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새롭게 재편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전 세계의 표준화된 개념은 더블 샷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진한 밀크 커피다.

브루잉 커피
압력을 이용하는 에스프레소와 달리 뜨거운 물을 커피에 부어 내리는 전통적인 블랙 커피를 의미한다. 전체적인 질감이 진하지 않아서 블랙 커피로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우유를 넣어서 연하게 마시는 카페오레도 대중적이다.


글을 쓴 심재범은 출장이 아주 잦은 회사의 직장인이자 커피 칼럼니스트다. 한국커피협회에 소속된 바리스타이기도 하며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커피 칼럼을 기고하고, 블루리본 서베이의 스페셜티 커피 세미나를 코디네이팅한다. <카페 마실> <스페셜티 커피 인 서울> <동경 커피> <교토커피>등의 책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