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구시가지의 시끌벅적함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20분쯤 지났을까, 핑강의 낮은 물줄기를 곁에 둔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이번 여정에서 몸을 누일 목적지, 라야 헤리티지다. 입구에 들어서니 사방이 탁 트인 로비가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다. 벽이 없으니 강바람이 그대로 들고 난다.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터라 몸이 잠시 끈적거리는 듯했지만, 이내 미지근한 공기가 살결에 닿는 생경한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호텔의 화려한 문법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높게 솟은 천장이나 번쩍이는 대리석 대신 손때 묻은 나무와 흙, 투박한 천들이 공간을 채운다. 태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 분럿 헴위짓라판(Boonlert Hemvijitraphan)은 이 호텔을 지으며 태국 북부의 옛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호텔의 핵심 콘셉트는 ‘장인정신’입니다. 건축가는 란나(Lanna) 왕국의 전통 요소를 현대적인 화이트&내추럴 톤으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죠. 그의 장기인 목재와 콘크리트를 활용한 정교하면서도 가벼운 터치가 호텔 전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머무는 동안 눈여겨보면 좋을 거예요.” 총괄 매니저이자 인테리어 디렉터인 나팟 눗사띠(Naphat Nutsati)가 연신 고개를 돌리는 우리를 보며 웃었다. 사실 그녀 역시 이 호텔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큐레이션을 담당한 핵심 디렉터다. 분럿 헴위짓라판이 건물의 뼈대와 구조를 잡았다면, 나팟 눗사띠는 그 안을 채우는 지역 공예품과 장인정신의 디테일을 완성한 파트너다. 실제로 호텔 곳곳에는 어부들이 사용하던 고기잡이 통과 낚시 바구니가 근사한 오브제로 변신해 자리하고 있었다.
라야 헤리티지의 객실은 총 38개. 모든 객실이 같은 크기지만 1층은 프라이빗 풀을, 2층은 넓은 테라스를, 3층은 란나 양식 특유의 높은 층고를 각각 보유했다. 방문을 열면 발바닥에 닿는 촉감부터 남다르다. 매끄러운 타일 대신 손으로 직접 빚은 테라코타 타일의 올록볼록한 기운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방 안을 채운 물건들도 하나하나 사연이 깊다. 나팟 눗사띠가 이끄는 디자인 팀은 호텔을 짓기 전 2년 동안 치앙마이 인근 산골 마을을 샅샅이 뒤져 장인들을 찾아냈다. 덕분에 장인들이 직접 깎은 티크나무 거울, 베틀로 짠 쪽빛 면직물, 대나무 바구니가 객실 곳곳에 자리 잡았다.
기계로 찍어낸 물건이 없어 조금은 삐뚤빼뚤한 풍경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테라스 소파에 몸을 파묻으면 잔잔한 핑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 건너편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물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2 로컬의 신선한 허브와 고산지대의 과실을 정교하게 배합한 반 타 라운지의 칵테일.
라야 헤리티지에선 미식도 특별하다. 메인 식당 ‘쿠 카오’는 쌀을 갈무리하던 바구니의 이름을 땄다. 메뉴판에는 치앙마이부터 미얀마, 라오스, 중국 윈난 지역의 색채가 섞인 음식이 가득하다. 윈난식 쌀국수나 돼지고기로 만든 북부 전통 요리에서는 우리가 알던 태국 요리와는 또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진다. 유기농 농장에서 가져온 싱싱한 채소로 차려낸 조식은 란나의 풍요로움을 입안 가득 전한다.
해 질 녘, 강변의 ‘반 타’ 라운지로 향했다. 칵테일 한 잔을 들고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엔 풀벌레와 강물 소리만 남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무언가를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마저 잊었다. 의도치 않은 디톡스가 실현된 것을 깨달았다.
사실 1년 전 취재차 이곳을 잠시 방문했을 때,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수많은 나라의 럭셔리 호텔을 다녀봤지만,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 이유가 조금 뜻밖인데, 바로 ‘향기’ 때문이었다. 인공적인 향을 지독히 싫어하는 내 취향을 아는 이들이라면 의아해할 대목이다. 호텔 숍에서 그 정체를 찾으려 애썼지만, 머무는 내내 호텔 전체와 객실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감싸던 그 고혹적인 잔향을 품은 제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 향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 타 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나팟 눗사띠 총괄 매니저가 웃으며 답을 내놓았다.
“똑같은 질문을 꽤 많이 받아요. 이 향은 태국의 프리미엄 뷰티 브랜드 ‘어브(Erb)’와 라야 헤리티지가 협업해 만든 우리만의 시그너처 향입니다. 어브의 기성 제품은 방콕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이 특별한 향수는 시중에서 살 수 없어요.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떻게든 챙겨드리고 싶어 찾아봤는데, 호텔용 대용량으로만 제작돼 소량으로 덜어드릴 방법이 없네요. 아무래도 조만간 정식으로 출시해야 할까 봐요.”
라야 헤리티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정적이었다. 불필요한 소음과 빛을 걷어낸 자리에는 나무의 결, 천의 질감, 핑강의 물소리, 그리고 은은한 태국의 향기가 채워졌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장인의 손길과 자연이 함께한 라야 헤리티지는 ‘진짜 럭셔리’가 무엇인지 조용히 웅변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가방 속 작은 수공예품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시끄러운 도시로 돌아가더라도, 이 잔잔한 정적의 힘이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