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농촌 기행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PARC JINMYOUNG

다시 쓰는 농촌 기행

Escaping Through Agritourism

농업(agriculture)과 관광(tourism)의 합성어인 애그리투어리즘(agritourism). 소멸해가는 농촌을 구하기 위해 태동한 이 여행법은 역설적이게도 도심 속에서 마모되어 가는 오늘날의 현대인을 구원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결을 가진 애그리투어리즘 여행지 5곳을 소개한다.
  • written by PARC JINMYOUNG
2026년 05월 07일

애초에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가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 정부는 급격한 산업화로 청년들이 농촌을 이탈하며 농업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아그리투리스모라는 묘안을 내놓는다. 농업과 여행의 합성어인 이 개념은 1985년 법제화되기에 이른다. 농가의 빈방을 여행객에게 내어주고 직접 기른 농산물로 식사를 대접하는 관광 형태를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오직 농민만이 운영할 수 있고, 식자재의 80%는 직접 생산한 것이어야 하며, 전통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법의 핵심. 국가 차원의 낮은 세율 적용과 개조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이러한 정책이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두자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이는 ‘애그리투어리즘’이라는 거대한 여행의 흐름으로 발전했다.
트렌드는 돌고 돌아 다시 본질을 겨냥한다. 아그리투리스모가 지켜온 가치는 오늘날 우리가 ‘지속가능한 여행’이라 부르는 것들의 모태가 되었다. 환경 보호라는 구호 이전에 이미 반세기 전부터 대지와 공존해온 여행의 원형인 셈이다. 하지만 과거의 아그리투리스모와 오늘날의 흐름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과거에는 정책적 배려를 등에 업은 농가의 초대가 여행자의 발길을 돌려 세웠다면, 지금의 현대인은 제 발로 농촌의 느린 호흡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밀집된 도심, 대규모 관광지 등에 지친 이들에게 한적한 농가에 머무는 일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오늘날의 애그리투어리즘은 전형적인 농촌 체험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취향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진화 중이다. 밭과 식탁의 경계를 허문 팜투테이블(Farm-to-Table), 대지의 서사를 음미하는 와이너리 투어, 농가의 안온함에 럭셔리를 더한 프리미엄 스테이 등이 대표적인 여행법이다. 애그리투어리즘 중심에는 농가 스테이가 있다. 유럽에서는 아그리투리스모, 미국이나 영국권에서는 팜스테이(Farm stay)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각기 다른 지역색을 입고 발전해왔다. 아그리투리스모의 원형을 고수하는 유럽이 전통 건축물과 미식을 통해 밀도 높은 휴식을 제안한다면, 미국은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한 노동과 체험에 집중한다. 아침에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 오기도 하고 말을 타거나 트랙터를 직접 운전해보는 등 실제 농장 업무에 깊숙이 뛰어드는 식이다. 최근 패션과 문화를 뒤흔든 ‘카우보이 코어’ 트렌드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낭만과 목장 체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세련된 호텔 대신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 시골 할머니 댁의 정취를 선택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촌캉스’라는 독특한 로컬 문화가 자리 잡았다. 농촌을 구하기 위해 탄생한 여행법이 이제는 현대인을 구하는 역설.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고 제 발로 시골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은 나를 지키기 위한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Agroturismo Son Pons
©Agroturismo Son Viscos

스페인 마요르카 Spain, Mallorca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섬 마요르카의 아름다운 해변 풍경 이면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진통이 숨어 있다. 마요르카 정부는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해 대형 호텔 신축을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해안가로 쏠린 시선을 내륙으로 돌리고자 아그리투리스모를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그 결과 마요르카는 명실상부 농가 투어의 성지로 거듭났다. 마요르카 내륙에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지어진 포세시오(Possessió)라 불리는 농가 주택들이 남아 있다. 과거 올리브유 추출기와 포도주 저장고를 갖춘 자급자족 공동체였던 이 거대한 저택들은 이제 역사적 건축물을 보존하는 동시에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결할 숙박 시설로 변모했다. 석회암 산맥인 세라 데 트라문타나(Serra de Tramuntana)의 웅장한 자락부터 농업의 심장부인 에스 플라(Es Pla), 바다와 인접한 산타니(Santanyí) 지역에 이르기까지, 여행자는 이곳에서 마요르카 시골 특유의 평온하고 정겨운 정취를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미국 버몬트 USA, Vermont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에 속한 버몬트주는 전통적으로 낙농업과 메이플 시럽 생산이 발달한 곳이다. 20세기 후반 산업화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소규모 가족 농장들은 숙박과 체험 서비스를 결합한 애그리투어리즘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버몬트는 미국에서도 로컬 푸드 운동이 가장 활발한 주 중 하나로 팜투테이블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여행자들은 아침에 갓 짠 우유, 농장에서 수확한 달걀, 버몬트 특산품인 메이플 시럽을 곁들인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뉴욕이나 보스턴 같은 북동부 대도시와의 접근성이 뛰어난 것도 큰 장점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Italy, Toscana
아그리투리스모의 정수로 꼽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는 르네상스 발상지이자 완만한 구릉지 위로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 고즈넉한 농가가 어우러진 전원 명소다. 자동차로 소도시를 오가며 아그리투리스모에 머무는 것이 대표적 여행법. 숙소는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데,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북부 키안티(Chianti) 지역은 와이너리 중심의 아그리투리스모가 발달돼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전형적인 토스카나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면 피엔차(Pienza), 몬테풀차노(Montepulciano) 등의 소도시가 속한 남부 발도르차 평원을 추천한다.

©대만관광청
©Kavalan

대만 이란 Taiwan, Yilan
수도 타이베이에서 차로 한 시간 달리면 산과 바다가 품은 이란현의 란양(蘭陽) 평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만에서 드물게 논농사가 발달한 이곳에서는 향긋한 파 요리부터 싱싱한 해산물까지 대지가 허락한 풍요로운 호사를 아낌없이 누릴 수 있다. 대만의 농가민박 ‘민쑤(民宿)’는 이란의 자연을 깊이 체험하는 통로다. 농사 스케줄에 맞춰 대지의 시간을 공유하고 갓 따온 채소로 차린 투박하지만 귀한 식사를 제공하는 민쑤가 여행자를 기다린다. 여기에 여행자의 피로를 씻어주는 자오시(Jiaoxi) 온천과 쑤아오(Suao) 냉천, 대만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 카발란(Kavalan)의 위스키 시음을 더하면, 이란은 오감을 깨우는 완벽한 애그리투어리즘의 무대가 된다.

©Susann Schuster/Unsplash
©Susann Schuster/Unsplash

일본 와카야마 Japan, Wakayama
간사이 지역 남부의 기이반도 와카야마현에 있는 구마노고도(熊野古道)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순례길이다. 이 길의 일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데, 수백 년 동안 순례자들을 먹이고 재웠던 농가민박 ‘민슈쿠(Minshuku)’가 순례길 곳곳에 자리해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순례자가 아니더라도 정갈한 다다미방에 머물며 깊은 산에서 얻은 고사리, 버섯, 죽순 등 산나물 중심의 식단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계단식 밭과 차밭이 펼쳐진 구마노고도의 아득한 자연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체험은 여행의 밀도를 한층 깊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