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카프와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인천을 출발한 대한항공 비행기가 브리즈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의 호주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목적지는 퀸즐랜드 남동부, 브리즈번 남쪽에 자리한 골드코스트다. 이번 여행은 배우 임세미와 함께했다. 목적은 2026 골드코스트 마라톤에 참여하는 것. 짐을 찾은 뒤 공항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롱블랙은 한국의 아메리카노보다 조금 진합니다. 주문할 때 참고하세요.” 브리즈번에 산 지 20년 된 코디네이터 케빈이 말했다. 진한 커피로 잠을 깨운 후 골드코스트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임세미는 지난해 열린 2025 시드니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찾은 데 이어 두 번째 호주 방문이다. “시드니 마라톤 대회는 저의 첫 국제 마라톤 대회였는데, 마라톤 뛰고 여유 있게 시드니를 둘러보지 못해서 아쉬웠거든요. 이번에는 기록 중심이 아닌 즐기는 마라톤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골드코스트의 자연과 낭만을 온전히 느끼는 여행도 하고 싶고요.”
골드코스트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할 겸 퍼시픽페어 쇼핑센터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쇼핑센터 내에 있는 서점 ‘북 페이스’로 자연스레 발길이 이어졌다. “여행 가면 항상 그곳의 서점에 들르는 편이에요. 책들을 보면 그 나라만의 문화가 보이거든요.” 러닝 관련 책과 그림책을 찬찬히 살피던 임세미는 우연히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강 작가의 <흰>과 <채식주의자>를 구입한 그의 얼굴에는 여행 첫날부터 ‘전리품’을 획득한 사람의 득의양양함이 묻어났다.

야생 속으로
골드코스트를 떠올리면 언제나 서퍼스 파라다이스가 따라왔다. 하지만 골드코스트는 서핑의 성지 이전에 웅장한 대자연이 품을 내어주는 곳이다. 야생동물을 만나고 싶다면 커럼빈 야생동물보호구역(currumbin wildlife sanctuary)으로 향하자. 골드코스트 남부에 위치한 이곳은 호주의 토종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치료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보전 활동을 이어가는 곳이다. 역사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봉가이자 화훼 재배자였던 알렉스 그리피스는 자신의 정원에 날아와 꽃을 먹던 야생 레인보 로리킷(Rainbow Lorikeet)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새들이 떼를 지어 모여드는 풍경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작은 로리킷 먹이 주기 공간을 일반에 공개한 것이 커럼빈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시작이다.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동물이 들어오면서 호주 야생동물을 폭넓게 만나는 공간으로 발전했다.
야생동물보호구역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유칼립투스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려 태연하게 낮잠을 자는 코알라를 발견한 임세미는 “꺄악! 너무 귀엽잖아요. 저, 코알라 처음 봐요.”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앙증맞은 코알라의 자태를 감상하고 네모난 똥을 싸는 웜뱃과 한번 물면 뼈까지 씹어 먹는다는 태즈메이니아 데빌을 마주한 후 캥거루가 뛰어노는 숲에 이르렀다. “동물들이 다닥다닥 좁은 철장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대자연에 풀어져 있는 게 좋아요. 가장 놀라운 건 새들이 서식하는 호수에 울타리가 없다는 거예요.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자연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새들은 울타리가 없는 공간 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캥거루는 사람들이 다가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낮잠을 잤다. 사람과 동물이 같은 풍경 안에 머무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비건 식단과 제로 웨이스트를 꾸준히 실천하며 선한 영향력을 전해온 임세미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영역을 해치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어요. 어떻게 하면 동물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전하면서 인간도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커럼빈 야생동물보호구역이 매년 1만 6000마리의 동물을 치료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입장료를 받고 공원을 운영한다는 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코알라를 안아보는 체험도 할 수 있지만 임세미는 굳이 줄을 서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바다, 골드코스트의 일상
“시드니가 크고 화려한 도시의 느낌이라면 골드코스트는 바다 마을 같아요. 한국에 비교하면 강릉이나 양양 같은 느낌이랄까? 아기자기하고 여유롭네요.” 임세미는 골드코스트의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질 좋은 파도는 골드코스트의 가장 귀한 자산 중 하나다. 이른 아침 반려견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고, 퇴근 후 서프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일이 이곳에서는 일상이다. “아마 골드코스트에 살았다면 매일 아침, 흑미(임세미의 반려견)와 함께 해변을 달리지 않았을까요?”
커럼빈 비치는 골드코스트 특유의 느긋한 해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서퍼뿐 아니라 아이들도 기세 좋은 파도를 향해 겁 없이 뛰어든다. 해변의 상징인 엘리펀트 록에 오르면 길게 이어진 백사장과 푸른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선셋 명소로도 유명하다. 오후 4시 30분,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 바닷가에 도착했다. 임세미는 어린아이처럼 파도를 쫓아 달렸다. 바지 아랫단이 흠뻑 젖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발끝에서 말갛게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뛰는 사이 붉은 해가 천천히 수평선 가까이 내려앉았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모래사장 너머, 멀리서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마천루가 신기루처럼 반짝였다.
골드코스트 여정에서 임세미가 꼭 해보고 싶다고 했던 일이 있다. 바로 비치 클린이다.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빼놓지 않고 실천하는 일 중 하나다. 마침 하프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 벌리 헤즈의 저스틴스 파크에서는 골드코스트 웨일&오션 페스티벌이 열렸다. 혹등고래가 호주 동부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시기에 맞춰 해양과 고래 보전의 중요성을 알리는 행사로, 환경·해양 단체의 부스와 교육 프로그램, 가족 체험, 라이브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저스틴스 파크에 도착한 임세미는 익숙한 로고를 발견하자 반색하며 달려갔다. “시 셰퍼드(Sea Shepherd)는 해양 생태계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환경 단체예요. 로고가 고래를 보호하는 해적을 표현한 거라고 해요. 제가 한국에서 캠페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단체예요. 몇 년 전에는 배를 타고 필리핀의 섬들을 도는 해양 보전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어요.”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티셔츠를 구입한 임세미는 비치 클린을 위해 벌리 헤즈 해변으로 향했다.
“바다에서 발견되는 쓰레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요. 일반 생활 쓰레기와 육지에서 흘러 들어온 쓰레기, 그리고 어업 활동에서 발생한 폐기물이죠. 얼마나 다양한 쓰레기가 있는지 한번 보시겠어요?” 임세미는 활동가다운 포스를 드러내며 해변 뒤편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비어 있던 봉투는 어느새 병뚜껑과 버려진 옷, 비닐, 담배꽁초, 플라스틱 병으로 가득 찼다. 봉투는 점점 무거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한 시간 남짓 쓰레기를 줍는 그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와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이 아름다움을 오래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혀끝으로 만나는 열대 정원
골드코스트에서 남쪽으로 차를 달려 뉴사우스웨일스주 경계를 넘자 완만한 구릉을 따라 짙은 초록빛 농장이 펼쳐졌다. 트로피컬 프루트 월드(Tropical Fruit World)는 뉴사우스웨일주에 위치하지만 골드코스트에서 30분이면 닿을 수 있어 골드코스트와 함께 방문하기 좋은 곳이다. 1983년 ‘아보카도랜드(Avocadoland)’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에게 문을 연 농장으로, 현재 500종이 넘는 과일 품종을 재배한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중요한 철학으로 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화산활동이 빚어낸 비옥한 토양과 열대우림, 맑은 저수지로 둘러싸인 농장에서는 망고와 바나나, 파파야, 리치, 잭프루트, 자보티카바, 블랙 사포테 같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과일을 만나볼 수 있다. “열매가 맺히는 시기가 달라 농장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지금은 오렌지와 포멜로, 커스터드 애플과 흔히 ‘초콜릿 푸딩’이라고 부르는 블랙 사포테, 별 모양의 스타프루트, 에그프루트로 불리는 카니스텔, 패션프루트 등이 열리는 시기예요.” 농장 가이드 캣 해밀턴(Kat Hamilton)의 설명을 들으며 트랙터를 타고 농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본 이국적인 생김새의 과일이 신기하기만 했다. 투어를 마친 후엔 과일 플래터를 시식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과일들로 채워진 접시는 작은 열대 정원을 연상시켰다. 그중에서도 임세미의 눈길을 끈 것은 과일 위에 보석처럼 흩뿌려진 작은 알갱이, 호주 원산의 핑거 라임이다. “정말 상큼한 맛이에요. 캐비아처럼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식감이 재밌네요.” 가이드의 팁대로 드래건프루트에 레몬을 뿌려 먹기도 했다. 생김새도, 향도, 맛도 제각각인 과일을 하나씩 맛보는 것은 이 땅의 생물다양성을 혀끝으로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시식을 한 후에는 작은 배에 올랐다. 보트가 농장 안의 수로를 따라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갔다. 고요한 정글에는 새소리만이 가득했다. 트로피컬 프루트 월드는 단순히 과일 농장이 아닌 거대한 생태계에 가까웠다. 농장에는 직접 재배한 과일과 채소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는 팜투테이블 레스토랑과 카페도 자리한다.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맛봐야 할 것은 ‘팜 프루트 아이스크림’. 농장에서 수확한 과일 중 원하는 것을 고르면 즉석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주는데, 농장에서 자란 과일을 달콤하고 시원하게 경험하는 방법이다.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기까지
플랫 화이트와 롱 블랙으로 대표되는 탄탄한 카페 문화는 골드코스트에서도 일상의 풍경이다. 탬버린 마운틴 커피 플랜테이션은 커피 재배부터 가공, 로스팅,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기까지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커피 농장이자 카페다. “재배부터 로스팅, 추출까지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니 호주 커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메뉴 주문 후 테라스로 나갔는데 웬걸, 월요일 아침부터 카페는 커피와 브런치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호주에서도 이런 농장은 흔치 않아요. 탬버린 마운틴 커피 플랜테이션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기도 하죠.” 케빈의 설명이 이어졌다.
카페 옆에는 커피 농장이 자리한다. 우리가 흔히 ‘커피콩’이라고 부르는 것은 커피나무에 열리는 열매, 즉 커피 체리(coffee cherry)의 씨앗이다. 열매가 충분히 익으면 하나씩 수확하고 과육을 벗겨낸 뒤 발효와 건조, 로스팅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우리가 아는 원두가 된다. 농장에서는 커피나무 사이를 걸으며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커피나무 옆에는 바나나나무가 함께 심어져 있는데, 바나나잎이 강한 햇빛을 차단해주어 커피 열매가 더 잘 열리도록 해준다. 가이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플랜테이션과 로스팅 공간을 둘러본 뒤 세 종류의 싱글 오리진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재배한 커피는 탬버린 마운틴의 개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세미는 커피 농장을 둘러본 후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맛봤다. “산뜻한 꽃향기와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풍미가 느껴져요.” K-7과 부르봉 품종을 옐로 허니 방식으로 가공한 싱글 오리진 커피는 레몬의 산뜻함과 재스민의 화사한 향,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진다.
커피 맛을 음미하던 중 안내판 하나를 발견하고 눈길을 멈췄다. “커피 농장에서 러닝 클럽도 운영하나 봐요. 시간이 맞았으면 참여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매주 일요일 아침 6시 30분이면 사람들이 농장에 모인다. 탬버린 마운틴의 한적한 길을 따라 5km를 달린 뒤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커피와 브런치를 즐기는 ‘TMCP 런 클럽’이다. 마라톤을 위해 골드코스트를 찾은 임세미에게 러닝과 커피가 연결되는 프로그램은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비록 참가는 못 했지만 탬버린 마운틴에서 마신 한잔의 커피는 달리기와 여행 사이에 작은 쉼표가 되어주었다.

포도밭에 머문 오후
골드코스트의 바다를 뒤로하고 래밍턴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목, 카눈그라 밸리에 들어서면 풍경의 밀도가 달라진다. 도로 양옆으로 높은 산줄기와 계곡,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이곳에 자리한 ‘오라일리스 카눈그라 밸리 빈야드(O’Reilly’s Caungra Valley Vineyard)’는 1999년 오라일리 가문이 문을 연 와이너리다. 부지에는 165년 된 유서 깊은 홈스테드 ‘킬로윈(Kiloween)’이 남아 있다. 포도밭 한쪽으로는 카눈그라 계곡이 흐르고, 넓은 잔디밭과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는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와인은 와이너리에서 마시는 게 가장 맛있는 것 같아요.” 임세미는 셀러 도어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테이스팅을 시작했다. 첫 잔은 산뜻한 ‘Lona Gold Sparkling’. 이어서 딸기와 라즈베리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로제 스파클링 ‘Lona Sparkling Blush 2024’, 패션 프루트와 구스베리, 레몬 향이 감도는 ‘Platypus Play Sauvignon Blanc Semillon’를 마셨다. 가벼운 버블과 화이트 와인을 마신 후 레드로 넘어가 체리와 보이젠베리 향이 특징인 ‘Bernard Reserve Chambourcin 2023’도 맛봤다. ‘맛도 향도 독특한 것 같아요.” 임세미의 반응에 스태프는 “카눈그라의 포도밭에서 직접 재배한 샹부르생으로 만든 와인이에요. 이곳의 자연환경을 응축한 와인이죠”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블루베리와 검은 자두의 짙은 과실 풍미를 지닌 ‘Shane Reserve Shiraz 2024’를 마셨다. 가벼운 버블에서 시작해 묵직한 시라즈까지, 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각기 다른 향과 풍미를 느끼는 것은 이 지역의 테루아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테이스팅을 마친 후에는 밖으로 나와 피크닉을 즐겼다. 와인을 마시기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햇살이 커다란 나무 아래로 스며들고, 잔잔한 바람과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야생 캥거루의 땅, 쿰바바 레이크랜드
“2019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어요. 그 후 제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죠. 코로나19가 시작됐고, 그 무렵부터 채식을 했고요.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자연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여행을 가도 도시보다 자연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골드코스트 북부에 자리한 쿰바바 레이크랜드 보호구역(Coombabah Lakelands Conservation Area)은 12km²가 넘는 면적에 유칼립투스나무 숲과 습지, 염습지, 맹그로브나무가 이어지는 자연보호구역으로, 대자연을 경험하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곳이다. 길게 뻗은 유칼립투스나무 사이로 햇빛이 잘게 부서지고, 평평한 산책로 주변으로 낮은 풀과 습지가 펼쳐졌다. 숲에 들어서자 야생 캥거루들이 무리를 지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주머니에 새끼를 품은 어미 캥거루,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일제히 한쪽을 바라보는 녀석들, 초원을 뛰어다니거나 서로 장난을 치는 캥거루까지. 동물원이나 사파리의 울타리 안이 아니라 그들의 삶 한가운데로 인간이 잠시 들어왔기에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캥거루의 모습을 담았다. 또 하나의 미션은 야생 코알라 찾기. 한참 나무 위를 올려다보던 임세미가 높은 가지에서 몸을 웅크린 채 쉬고 있는 코알라 세 마리를 발견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에서 유유자적 잠을 자는 코알라를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골드코스트에서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5시간도 채 되지 않는 빠듯한 일정 속에서 해변을 달리고, 대자연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동물을 만나고, 자연이 키운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
“배우 임세미와 인간 임세미의 삶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아가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해요. 작품도 중요하지만, 쉴 때 제 정신과 건강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어쩌면 그녀에게 여행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마친 그는 10월, 다시 배우의 시간으로 돌아가 연극 <유리동물원>으로 관객과 만난다. <유리동물원>은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1944년 발표한 희곡이 원작인 작품으로, 저마다 다른 생각과 목표를 지닌 가족이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각자의 이상을 간직한 채 살아가려는 과정을 담았다.
“2년 만에 연극 무대에 다시 서는데, 연극 무대는 한 공간 안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지기에 정말 소중한 시간이에요. 제가 연기하는 로라는 다리가 불편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에요. 외부 세계와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집 안에서 작은 유리동물을 돌보며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죠. 로라를 보면서 골드코스트 여행이 많이 떠올랐어요. 자연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무해한 동물 친구들을 만났던 시간이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유리동물원>은 작고 연약해 쉽게 지나쳤던 존재의 귀함을 떠올리게 하는 연극이거든요.” 여행은 끝났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삶의 감각은 일상으로, 무대 위 로라의 시간으로 계속 이어진다.
스타일리스트 조아름 메이크업 정혜선 헤어 이소영 필름 강수정 코디네이터 케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