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핍은 여행의 이유가 된다
“영국인들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국인 아내와 결혼 후 영국으로 이주한 미국 출신 작가 빌 브라이슨은 영국 여행기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생각해보니 나의 런던발 여행은 대부분 어떤 결핍에서 시작됐다. 수개월간 잿빛 하늘 아래 맴돌던 우울감이 곧 폭발할 것 같아서, 비싼 물가 때문에 일주일 내내 밥을 짓다 기운이 빠져서, 신선한 해산물을 먹고 싶어서 등등 여러 이유로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은 날. 항공권 비교 사이트에서 유럽 여러 도시를 넣어가며 비행기 편을 검색하다 왕복 60파운드짜리 이탈리아 바리(Bari)행 티켓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런던에는 공항이 무려 5개나 있어서 유럽 어느 도시로든 접근성이 뛰어나다.) 60파운드는 런던의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플레이트와 와인 한 잔의 가격이다. 한술 더 떠 풀리아관광청 웹사이트에서는 나에게 어서 오라 손짓하듯 ‘날것의 생선과 해산물(Raw Fish & Seafood)’로 이름난 곳이라며 홍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떠난 풀리아에 도착해 아드리아해로 둘러싸인 해변 풍경을 SNS에 올렸더니 지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풀리아 여행 갔나 봐요. 사람들이 순박하고 물놀이하기 좋은 동네죠. 부라타 치즈 많이 먹고 와요.” 마침 부라타의 원산지가 풀리아주의 안드리아(Andria)다.



느린 템포의 해변 마을, 모노폴리
풀리아의 주도인 바리에서 기차로 30분 걸리는 모노폴리(Monopoli)에 숙소를 잡았다. 바리로 가는 직통 열차가 30분 간격으로 있을 뿐 아니라 완행열차를 타면 해안선을 따라 토레 아 마레(Torre a Mare), 모라 디 바리(Mola di Bari), 폴리냐노 아 마레(Polignano a Mare) 등의 소도시에 쉽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8시 무렵, 거리에 늘어선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다. 문을 닫는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리포소(riposò, 브레이크타임) 이후 저녁 장사를 준비 중이다. 이탈리아 남부에는 리포소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라 콘트로라(la controra)’라는 말이 있다. 여름 해가 가장 뜨거운 오후 1시부터는 서너 시간 동안 일과를 멈추고 블라인드를 내린 채 숨을 죽이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오후가 되면 길거리에 적막이 감도는 이탈리아 남부 특유의 나른하고 평온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리포소를 지키는 레스토랑은 보통 자정 직전 혹은 그 이후까지 손님을 받는다.
장시간 이동에 지쳐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식당은 풀리아식 해산물 요리 전문점 쿠쿤치(Cucunci). 이탈리아어로 케이퍼 열매(caperberry)라는 이름처럼 큼지막한 케이퍼를 얹은 한 입 크기의 포카치아가 식전 빵으로 나온다. 메인으로 주문한 랍스터 파스타도 흠잡을 데 없지만, 스타터로 맛본 안초비 브레드 볼은 식전주와의 궁합이 훌륭하다. 과거 풀리아 지역의 농부와 어부들이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을 버리지 않고 물이나 우유에 적신 뒤 달걀, 파슬리, 마늘 등을 더해 튀겨 먹던 것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현지에서는 이를 폴페테 디 파네(Polpette di Pane)라 부르는데, 내륙에서는 치즈와 채소를, 해안가에서는 안초비를 곁들이곤 했다고. 바삭한 겉면, 촉촉한 속살에 안초비의 감칠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져 와인 안주로는 더할 나위 없다.
미식의 땅 풀리아에서는 하루 세 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찾아낸 묘수는 각 지역 특산품을 조금씩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치즈&살라미 플래터를 주문하는 것이다. 이른 시간, 플래터에 와인 한 잔을 외치며 레스토랑 티티 라 피치케리아(Titti La Pizzicheria)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직원 앤소니가 플래터에 담긴 치즈와 살라미를 하나하나 소개한다. “순서대로 말린 토마토를 곁들인 미니 부라타, 이걸 훈제한 부라티나(Burratina), 모차렐라를 땋아 만든 트레차(Treccia), 풀리아 전통 생치즈인 준카타(Giuncata)예요. 카치오카발로(Caciocavallo)는 이탈리아 남부를 대표하는 치즈고요. 여기에 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Pecorino), 바질 페스토 향의 바키노도 조금 더했고요.” 급하게 부라티나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자 훈연 향이 먼저 올라오고 뒤이어 크리미한 단맛이 입안에 번진다. “살라미는 후추가 들어간 판체타, 카르파초, 매콤한 살라미, 모르타델라 그리고 풀리아 남부의 마르티나 프랑카에서 가져온 카포콜로(Capocollo di Martina Franca)가 있습니다. 케이퍼를 넣은 구운 피망과 가지, 잼을 기호에 맞게 함께 즐겨 보세요.” 그의 두 손에는 와인과 물이 들려 있다. “바리 근처 소도시 투리(Turi)에서 생산된 풀리아 대표 와인입니다. 테누테 코피(Tenute Coppi)라는 와이너리의 말바시아 비앙카(Malvasia Bianca) 품종이죠.” 와인은 화사하면서도 깔끔하다. 몇 번이고 음식이 어떠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이 여행을 위해 연습한 이탈리아어로 답한다. “È tutto buonissimo(모든 게 정말 맛있어요).”




낭만적인 해안 마을에서 만난 문어의 왕
여행자에게 풀리아가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로 칭송받는 데 크게 기여한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폴리냐노 아 마레다. 풀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도메니코 모두뇨(Domenico Modugno)가 자란 곳이고, 풀리아의 상징적 장소인 절벽에 둘러싸인 해변 라마 모나킬레(Lama Monachile)가 자리한다. 모두뇨의 대표곡 ‘Nel blu dipinto di blu(파랗게 물든 파란 하늘 속에서)’와 후렴구 “Volare(날아올라)”를 안다면, 왜 이 해변에서 에너지 드링크 기업 레드불이 매년 다이빙 대회를 개최하는지 납득이 갈 것이다. 대회 시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절벽 속 동굴을 가로지르거나 기어올라 날듯이 바다로 뛰어든다. 항구가 있는 모노폴리의 해변은 잔잔한 반면, 절벽으로 둘러싸인 폴리냐노 아 마레의 해변은 수심이 깊고 파도가 높다. “라마 모나킬레의 절벽은 다이빙 스폿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집이자 발코니이기도 합니다. 바로 제 얘기죠.” 한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점원은 이 관광지를 벗어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칼라 파우라(Cala Paura)로 가보라고 추천했다.
폴리냐노 아 마레에는 이곳의 명성을 더해주는 노포들이 있다.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카페 ‘일 슈페르 마고 델 젤로 마리오 캄파넬라(Il Super Mago del Gelo Mario Campanella)’의 역사는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젤라토 가게로 시작한 만큼 인기 메뉴는 단연 젤라토지만, 카페 스페찰레(Caffè Speciale)를 마셔볼 것을 권한다. 에스프레소, 아몬드 리큐어인 아마레토, 크림, 시트러스류인 라임이나 레몬 껍질을 넣은 음료. 거칠게 말해 맥심 커피에 약간의 알코올, 과육도 아닌 과일 껍질을 넣은 것인데 예상 외로 조화롭다. 리큐어 향이 아주 잠시 튀어오르지만 더운 여름 활기를 북돋을 정도의 상큼함이 매력적이다.
풀리아 대표 음식인 해산물 버거의 대중화를 이끈 곳은 페스카리아(Pescaria)다. 해산물 버거를 젊고 스타일리시한 수제 버거로 재해석하면서 단숨에 인기를 끌었다. 소고기 패티 대신 통통한 문어 다리와 구운 피망, 훈제 치즈, 바질 소스를 넣은 문어 버거가 대표 메뉴. 해산물 소스는 간장, 와사비, 초장, 생강이 진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참치회와 스트라차텔라 치즈(Stracciatella cheese)의 조화는 천상의 맛 그 자체다. 부라타 치즈를 반으로 가르면 쏟아지다시피 흘러나오는 크리미한 부분이 바로 스트라차텔라인데, 이 역시 풀리아에서 유래했다.
기념품 가게 청년이 말했던 칼라 파우라로 가는 길. ‘페스케리아 다 파스쿠알리노 일 레 델 폴포 바리(Pescheria Da Pasqualino Il Re del Polpo Bari)’를 마주쳤다. 페스케리아는 이탈리아어로 어시장, 생선 가게 등을 의미한다. 한국의 노량진처럼 싱싱한 수산물을 도소매로 파는 것은 물론, 진열된 해산물을 직접 고르면 즉석에서 요리해 내어주는 식당 겸 수산 시장인 셈이다. 포구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이 노포는 굴, 새우, 오징어, 홍합 등을 손질해 날것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심지어 상호가 ‘문어의 왕(Il Re del Polpo)’이라니! 고심 끝에 나는 지중해 전역에서 나는 붉은새우(Gambero Rosso)와 굴을 한 팩씩 주문했다. 주인이 내게 아이스 버킷 안 안지울리 도나토(Angiuli Donato)의 마코네 프리미티보 로사토(Maccone Primitivo Rosato)를 내민다. 프리미티보는 풀리아의 대표적인 적포도 품종으로 체리, 딸기 같은 붉은 과실 향이 감돌며 달지 않고 미네랄 풍미가 도드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와인 한 잔과 달콤하고 녹진한 식감의 붉은 새우, 굴을 스탠딩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 홀로 해산물 파티를 즐긴다. 라마 모나킬레에 한 차례 수영한 뒤라 파티 복장은 전혀 아니지만, 내면에서만은 도파민이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정해진 틀 없는 여행에서 얻은 해방감
5박 7일 여정 중 4박을 모노폴리에서 했다. 일어나면 곧장 카페 레테라리오(Caffè Letterario)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크루아상과 카푸치노, 에스프레소로 배를 채우며 그날 갈 해변을 검색했다. 모노폴리에 있는 포르토 비안코(Porto Bianco), 포르토 로소(Porto Rosso), 포르토 네로(Porto Nero), 포르토 베르데(Porto Verde) 등은 이제 더 이상 항구(Porto)가 아니라 해수욕장이다. 기분 따라 여기저기 해변을 오가며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바닷물이 차가워질 때쯤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연중무휴 새벽 2시까지 문을 여는 해산물튀김 가게 겸 바 ‘칼라마리 & 리쿼리(Calamari & Liquori)’에서 문어튀김 혹은 새우튀김을 사 먹었다. 주문 즉시 튀긴 해산물이 레몬 한 조각과 함께 콘 형태의 포장 용기에 담겨 나온다. 카페처럼 쿠폰이 있었다면 한 번은 무료로 먹었을 정도로 4일 동안 매일 두 번씩 이 가게에 갔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항구를 따라 걷고, 젤라토를 먹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슬쩍 고백하자면 여행하기 전만 해도 이곳은 내게 무인도 같았다. 박물관이나 갤러리, 서점 같은 문화 공간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고 물어도 아는 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주로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나의 여행 습관은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규칙에서 벗어나 알람 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해산물 한 접시의 가격을 듣고 두세 번씩 고민하지 않는 곳, 풀리아에서만큼은 나를 속박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이 여유를 누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이탈리아 풀리아주를 여행하는 법
인천에서 출발해 로마나 밀라노를 거친 뒤, 이탈리아 국내선으로 갈아타면 풀리아의 주도인 바리나 브린디시(Brindisi)에 닿는다. 온화하고 따사로운 날씨가 여행자를 반기는 바리를 비롯해 독특한 원뿔형 가옥이 늘어선 알베로벨(Alberobello), 아찔한 절벽 해안 마을 폴리냐노 아 마레 등 미식과 자연, 문화가 어우러진 소도시가 저마다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