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의 특징을 꼽으라면 단연 고행이 아닐까 싶다. 박서보·권영우·정창섭 등 한국 단색화의 거장들이 그랬듯, 채우기보다는 덜어내고 반복하는 수행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고 정화하는 구도자적 태도가 작품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의 물건을 비정형화하는 1990년대생 화가 이희조의 작품에도 그러한 태도가 엿보인다. 수많은 점과 선을 반복해 이미지를 만들고 판화를 찍듯 한 층 한 층 차례대로 겹쳐 조색한다는 그녀만의 작업 방식을 알기 전에도 말이다.
한국의 정신과 미감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작가에게 주거와 문화적 환경 변화는 어떤 예술적 파장을 불러올까? 이희조 작가는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파리국제예술센터(Cité Internationale des Arts)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란 예술가가 특정 장소에 머무는 동안 창작 활동을 하도록 숙소, 작업실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3개월 동안 바게트와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센강 변을 걷고, 궂은 날씨 속 도시의 윤곽을 바라보고,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붓 터치에 감명을 받고, 틈틈이 주변 도시를 여행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창작을 위해 파리에 머문 작가에게 그 도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답은 이희조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잼과 버터, 박물관에서 산 굿즈, 커피와 영수증. 늘 그랬듯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일상은 고스란히 작품의 씨앗이 되었다. 찰나의 순간과 감정을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체화했기에 파리에서의 하루하루는 그 누구의 것보다 치열하고 소중했을 터. 결국 이희조 작가에게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삶의 순간을 켜켜이 퇴적시킨 기록에 다름없다.


Q 파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나요?
지난 3월까지 파리에 있었어요. 돌아오자마자 파리와 서울 도산에서 각각 개인전을 열었는데, 모두 7월 말에 끝났고요. 전시가 막을 내리고 나니 이제야 완전히 여행에서 돌아온 느낌이 들어요.
Q 파리 생활은 잘 맞았나요?
익숙하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잖아도 이번 여름 파리에 대단한 폭염이 왔다는데, 제가 있던 시기는 겨울이라 날씨도 견딜 만했고요.
Q 그곳에서의 일상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직장인의 삶을 동경하거든요.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파리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1년에 쉬는 날이 열흘이 채 안 될 정도로 그림에 집중했어요. 그래서 파리에서는 잘 쉬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Q 파리와 서울, 두 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개인전을 열었어요. 두 전시 사이에는 어떤 차별점이 있었나요?
파리에서 열었던 전시는 «줄틴(Jultin)», 즉 ‘빌린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했어요. 3개월간의 파리 일상을 담은 전시로 일기의 성격이 짙었죠. 서울에서 선보인 «일과 일 사이»는 오히려 좀 더 소설 같달까. 작업실과 휴식 공간을 나눠 일과 휴식을 넘나드는 일상을 이야기해요. 저는 전시를 할 때마다 하나의 페르소나를 정해 작품을 풀어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정원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다음, 정원사의 도구부터 그 사람이 키우는 식물까지 정원사 주변에 있을 법한 대상을 정물화해요. 그래서 제게 작업은 소설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아요
Q 소설과도 같은 작업을 이어오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가 있다면요?
첫 개인전에 등장했던 가상 인물 ‘오든(Auden)’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전시의 출발점은 ‘모든 이야기는 가정에서 시작된다’라는 생각이었어요. 사람이 가정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상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싶었어요. 오든의 집을 하나의 무대로 삼고, 수영장이 딸린 집부터 윔블던의 어느 주택가 현관문, 히스로 공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별과 만남의 풍경까지. 런던 유학 시절의 기억을 살려 오든을 둘러싼 사물들을 이미지화했죠. ‘화각풍속화문가구’를 모티프로 한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여성을 페르소나로 설정했는데요, 전시 준비 기간 중 머리를 식히러 대구 사유원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어요. 수백 년 수령의 모과나무와 배롱나무 사이를 거닐며 휴식을 취했죠. 자연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을 통해 우리 옛 농가의 평화로운 일상과 풍속을 담는 가구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Q 판화를 전공한 영향인지, 회화 작품이지만 판화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학사 때는 판화를, 석사 때는 회화를 전공했어요. 제가 판화라는 매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개념이 바로 ‘레이어(층)’예요. 보통 한 판에 한 가지 색을 넣어 찍는데, 이 레이어가 열 가지 정도 쌓이면 색감이 훨씬 다양해져요. 페인팅 작업을 할 때도 이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요. 작업하기 전 몇 가지 색을 쌓을지 계획을 세우곤 하죠. 한 가지 색을 조색하면 그 색이 들어가는 부분을 먼저 칠하고 다음 색을 조색해 다시 칠하는 식이죠.
Q 그런 방식을 고수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일반적으로 회화는 직접성이 강한 작업이잖아요. 그날의 감정에 따라 처음 생각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고 색채가 크게 달라지기도 하죠. 제 작업 방식의 경우, 스케치를 마치고 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머릿속에 다 그려져 있어요.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의도한 대로 완성할 수 있는 거죠. 작업할 때 감정에 치우쳐 색을 쓰지 않다 보니 처음 시작할 때 품었던 감정이 그대로 전가되는 편이에요. 이런 방식이 제 성격과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Q 사물의 면을 넓게 펼치는 듯한 그림체를 완성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학교를 졸업하고 이미지를 정말 많이 수집했어요. 좋아하는 책, 가구, 건물 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담긴 공통점을 발견해나갔죠. 그때 제가 전반적으로 덩어리감 있는 사물에 매력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어요. 날씬하고 가느다란 형태보다는 캔버스를 꽉 채우는 부피감 있는 요소를 강조하는 편이죠. 이런 취향은 자연스럽게 제 삶을 향한 질문으로 이어졌어요. ‘내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지?’ 돌이켜보니 결국 사람, 사물, 장소 이 세 가지밖에 없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과 또 어떤 사물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아요. 그 하루하루가 쌓여 삶이 되고,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고. 이 세 가지가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겠구나 싶더라고요.
Q 다시 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영국 런던에서 석사과정을 보냈기 때문에 적응이 쉬울 줄 알았는데, 역시나 파리는 파리더라고요.(웃음) 열쇠 돌리는 방향부터 건식 화장실 사용법, 트래블 카드를 쓸 수 있는 마트를 찾는 일까지 생소한 매뉴얼을 익히느라 한 달을 보낸 것 같아요.
Q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는 어땠나요?
각자 작업에 몰두하느라 생각보다 깊이 친해지기 쉽지 않더라고요. 한 가지 재미있었던 건, 당시 시앙스포 생제르맹앙레(Sciences Po Saint-Germain-en-Laye) 대학원 석사생들이 레지던시에 머무는 몇 명의 아티스트를 고른 뒤 직접 큐레이팅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그분들이 저를 선택해주셔서 현지에서 뜻깊은 오픈 스튜디오 전시를 열 수 있었죠.
Q 특별히 작가님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구도를 잡을 때 한국 고유의 전통 회화인 책가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거든요. 제겐 워낙 익숙한 방식이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현지 사람들은 그런 구도나 화법을 신기하게 보더라고요. 함께 전시를 준비하며 서로 많은 것을 나눴는데, 그 소통 방식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Q 파리에서 새로 시도하거나 배운 게 있다면?
주로 사용하던 아크릴 말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작가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유화를 거의 다루지 않았는데, 파리에서 돌아온 후 다시 유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요.
Q 가장 자주 갔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레지던시가 센강이 보이는 곳에 있었어요. 창문에서 고개를 좀 많이 내밀면(웃음) 센강이 보이거든요. 거기서 파리지앵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어요. 노란 가로등 불빛이 검은 물결 위로 떨어지는 풍경 속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와인을 마시고 산책도 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들 말이죠. 여차하면 센강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러닝을 하기도 했는데, 유명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런 일상에 스며드는 순간이 더 좋더라고요.
Q 파리에서 완성한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무엇인가요?
대부분 3호 크기의 아주 작은 소품 위주로 그렸는데, 제법 큰 50호짜리 그림도 한 점 작업했어요. 작은 작품에는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하나씩 그렸다면, 50호 작품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풍경을 넓게 펼쳐낼 수 있어서 애착이 남달라요. 현지의 전시 반응도 꽤 괜찮았어요.(웃음) 사실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라 전시를 준비할 때 걱정이 많았거든요.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뜻깊었어요.
Q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궁금해요.
제 작업은 아주 작은 점을 하나씩 찍어서 완성해요. 수많은 점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되듯 매일의 소중한 시간과 일상이 쌓여 결국 내 삶이 되죠. 앞서 이야기했듯 인생은 결국 사람과 사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좋아하는 물건을 곁에 두고 소중한 이들과 시간을 나누는 것, 그게 바로 일상을 가꾸는 방법이자 저만의 창작 세계를 만드는 방법이에요. 제 작품을 통해 잠시라도 무심코 지나쳤던 각자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창작의 이유는 충분해요.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전통 정물화이자 민화의 한 종류. 책장과 그 안에 놓인 책, 문방사우, 도자기, 향로 등 다양한 기물을 함께 그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