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키우기가 나를 구원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기 전부터 이미 식물들은 조금씩 나를 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어느 조직에 소속된 적 없이 꾸준히 프리랜서, 농담을 조금 보태어 ‘순혈 프리랜서’로 살아왔다. 계획을 세워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프리랜서였다면 좋았을 텐데, 애초에 나는 그럴 인간이 못 되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나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이런 나를 바꾼 건 다름 아닌 식물이다. 본격적으로 식물을 키우면서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해줘야 식물이 더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구도 나를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분명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최대한 많은 작물을 심고 길러 먹으려 더 철저하게 계획하고 구획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인생의 모든 시기를 게으른 집순이로 살았지만, 집에 함께 사는 식물이 늘어나면서 더욱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식물과 나를 돌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사라지곤 하니까. 하지만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 종종 찾아올 때면 그 누구보다 망설임 없이 가방을 꾸린다. 잘 떠나는 사람이어야 스스로의 자리에서 더 잘 머무는 사람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식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답게 여행지의 식물원을 헤매는 건 여행 계획 중 가장 즐겁고 중요한 부분이다.
낯선 도시의 식물원에 도착하면 그곳의 기후와 식물원의 방침에 따라 수형이 제각각 다르게 자라나는 식물을 구경하는 데 혈안이 된다. 특히 어디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식물의 경우 그 차이 비교하기가 그토록 흥미로울 수 없다. 선인장의 한 종류 ‘용신목’을 예로 들겠다. 짙은 녹색의 외피와 양옆으로 뻗어 올린 줄기, 여기저기 뾰족하게 돋은 가시를 가진 선인장의 대표적인 종이다. 비교적 물을 많이 쓰는 식물원의 용신목은 두껍고 크게 자라지만, 물을 아끼는 식물원의 용신목은 날렵하고 단단하게 자란다. 어떤 정원사가 어떤 마음으로 용신목을 돌보았을지 상상하는 것도 식물원 여행의 묘미다.
한번은 발리에 간 적이 있다. 굳이 식물원까지 가지 않아도 눈 두는 곳마다 모두 초록으로 아름다운 도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곳의 식물원이 더욱 궁금했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기후의 식물원답게 나무는 거대하고 이파리는 행복해 보였다. 덥고 습한 날씨에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너무 멋있잖아! 여기 구석에 오두막 짓고 살고 싶다” 같은 감탄만 연신 내뱉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식물이 행복해 보이는 발리에서 행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종이 있다면 그게 바로 선인장이었다. 선인장 온실에 들어서자 줄기가 여기저기 물러 상처가 난 선인장이 ‘제발 죽여줘’라며 온몸을 비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깥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선인장 온실의 어둠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제습기로 연신 습도를 낮추고 온도를 맞추는 등 식물학적으로 관리할 테지만, 놓치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너희는 정말 괴롭겠구나…’ 생각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 온실 밖의 야자나무가 행복하게 키를 키우고 해를 향해 가지를 뻗을수록 온실 속 선인장은 더 괴로움에 빠지는 운명을 타고난 것을 어쩌겠는가.
나의 식물원 여행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영국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이다. 사실 런던은 서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도시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면 언제나 ‘이번에는 런던을 빼볼까’ 하다가도 결국 런던행 비행기를 찾곤 한다. 목적지가 체코라도, 파리라도, 아이슬란드라도 상관없이 일단은 런던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다음 도시로 움직인다. 큐 왕립 식물원의 존재는 런던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다. 큐 왕립 식물원에 가기 위해선 엄청난 재화와 노력을 들여야 하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해 내가 하는 일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숨 쉬며 풀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뿐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의 팜 하우스와 아름다운 정원을 빠르게 지나친다. ‘식물 배치가 바뀌었군’ ‘이 문은 더 낡았군’ ‘연꽃이 훨씬 많이 늘어났군’ 정도의 감상으로 식물원이 자랑하는 공간을 지나고 나면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떡갈나무 숲에 도착한다. 정말이지 바닥난 삶의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에 완벽한 숲이다. 나는 그곳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점심거리로 싸 간 샌드위치를 먹다가, 사과를 베어 물었다가, 오리와 백조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곤 한다. 내가 떨어뜨릴 음식 부스러기를 탐내는 조류와 곤충만이 나를 신경 쓸 뿐 인간들은 그 누구도 “당신 왜 여기 누워 있냐?”고 묻거나 따갑게 바라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 밖에 있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끼고 싱그러운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마음에 평온이 차오르는 기분을 만끽한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서울식물원을 자주 찾는다. 멋진 온실과 넓은 호수를 둘러싼 정원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도서관이 두 개나 있다. 씨앗 도서관에서는 씨앗을 대여해 나의 정원 가꾸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식물 전문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며 식물 공부에 열중하는 것도 내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에 서울식물원에 있다 보면, 내가 적을 둔 도시의 식물원이 그 어떤 곳보다 더 값지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누구에게나 지친 마음을 급속으로 충전해줄 무언가를 갖고 있다. 밥벌이에 지치고, 도시의 열기에 녹다운되고,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치이는 날일수록 나는 더 열심히 화분에 물을 주고 이파리를 닦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원의 구석 자리를 떠올리며 어느 햇살 좋은 오후 그곳에 다시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날을 상상한다. 좋아하는 것을 더 힘껏 좋아하기. 이유도 계획도 한계도 없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기. 텅 빈 마음의 우물을 가득 채워줄 사랑을 곱게 다루며 아끼기.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다. 언제까지라도.

임이랑 작가가 추천하는 식물원
큐 왕립 식물원
죽기 전에 단 한 곳의 식물원에 갈 수 있다면 무조건 이곳으로 향할 것. 런던 남서부에 위치한 큐 왕립 식물원은 단순한 식물원을 넘어 식물학 연구 현장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온실부터 거대한 떡갈나무들이 줄지어 자리 잡은 숲까지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팔방미인 식물원.
클라우드 포레스트
싱가포르의 최대 관광지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에 위치한 초대형 온실. 클라우드 포레스트에서는 열대식물과 양치식물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온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35m 높이의 클라우드 마운틴을 마주하게 되는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시원한 물줄기와 거대한 식물을 보며 그 아름다움과 싱그러운 생명력에 압도되고 만다.
여미지식물원
제주에 있는 식물원으로, 한국에서 가장 애정하는 곳 중 하나다. 교육과 관광,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장소. 3794평의 대형 온실은 중앙 홀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신비의 정원, 꽃 정원, 물의 정원, 선인장 정원, 열대 정원, 열대 과수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섹션마다 흥미로운 식물을 만날 수 있다.
글을 쓴 임이랑은 작가이자 뮤지션이다. 밴드 디어클라우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식물 이야기를 쓰고, 식물 사진을 찍고, 식물에 대해 말하는 사람. 저서로는 <아무튼, 식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불안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리라> <밤의 마음>이 있으며, EBS 오디오e지식에서 <임이랑의 식물수다>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