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길의 시간, 우캉루와 안푸루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LEE JIHYE
  • PHOTOGRAPHY BY KIM EUNJU

두 길의 시간, 우캉루와 안푸루

Intersecting Eras on Wukang and Anfu Roads

헤리티지를 재해석하는 상하이 특유의 유연한 힘을 짧은 두 길에서 목격했다. 우캉루와 안푸루가 빚어내는 시간의 기록.
  • written by LEE JIHYE
  • PHOTOGRAPHY BY KIM EUNJU
2026년 04월 30일

이른 아침 우캉맨션으로 향했다. 전날 하루 종일 내리다 늦은 밤에야 그친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원의 짙어진 꽃향기, 깨끗해진 도로, 먼지 걷힌 공기를 만끽하며 10여 분을 걷자 우캉루 초입을 지키는 우캉맨션에 도착했다.
눈앞의 이 건물은 1924년, 상하이 근대건축을 상징하는 헝가리 출신의 천재 건축가 라슬로 후데츠(László Hudec)의 작품이다. 당시 프랑스 조계지에 기반을 둔 외국계 회사 소속 서양인 직원을 위한 고급 아파트로 지었는데, 좁은 삼각형 모퉁이 부지의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물 앞부분을 다리미처럼 뾰족하게 설계해 ‘플랫아이언(Flatiron)’ 스타일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오전 일찍 경찰들이 교통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육거리 곳곳에서 셔터를 누른다. 우캉맨션을 배경으로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와 사람이 신호에 맞춰 착착 바뀌는 장면을 한참 바라보다 본격적인 우캉루 탐험에 나섰다.
1907년 처음 프랑스 조계지로 조성되었을 당시, 미국인 선교사이자 상하이 근대 교육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존 캘빈 퍼거슨(John Calvin Ferguson)의 이름을 따 퍼거슨 로드라 불리던 이 길은 프랑스 조계지의 정수로 손꼽힌다. 도로엔 상하이식 연립주택인 시쿠먼과 다르게 유럽식 단독 빌라인 라오양팡(老洋房) 양식의 집들이 1km 남짓 늘어서 있다. 상하이가 지정한 ‘우수 역사 건축물’이 이 짧은 길에만 37개에 달한다. 아르데코, 지중해, 프랑스 르네상스 등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어 올린 빌라는 높은 담장과 가로수 그늘에 가려 비밀스러운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대문호 바진(巴金)을 비롯한 정·재계 명사들이 사적인 은신처로 삼았던 이 저택들은 이제 상하이의 헤리티지를 상징하는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었다.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낡은 주택의 1층을 감각적인 편집숍이나 갤러리, 레스토랑, 베이커리, 카페로 탈바꿈시켰다. 상하이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인 바진의 집 앞에 도착하니 내부는 공사 중이었다. 40년간 머물며 시대의 아픔을 글로 옮겼던 우캉루 113호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가 직접 심었다는 나무는 높은 담장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뻗은 1km 정도의 우캉루가 끝나면 안푸루가 시작된다. 가로로 난 이 길도 800m로 무척 짧지만, 우캉루와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1915년부터 조성돼 과거 서구의 외교관이나 명사들의 주거지로 사용되던 이곳은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이자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폴 두메르(Paul Doumer)의 이름을 따 두메르 로드로 불렸다. 그러다 예술가들로 거리가 채워지기 시작한 건 1995년 이곳에 상하이 드라마 아트 센터가 문을 열면서다. 연극을 보러 배우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따라 세련된 카페와 예쁜 가게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지금은 뷰티 편집숍 하메이(Harmay) 플래그십,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인(In), 로컬 빵집의 대명사 선플라워(Sunflour) 등 로컬 브랜드가 자리를 채우며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상하이에서 가장 힙한 거리’로 손꼽히는 지역이 됐다. 실제로 곳곳엔 사진가를 대동한 인플루언서들이 자신만의 패션과 포즈로 개성 있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넋을 잃고 구경하는 나에게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상하이에 와서 하는 왕홍 체험이 인기라면서요? 사실 왕홍(网红)은 인터넷을 뜻하는 ‘왕(网)’과 인기가 있다는 의미의 ‘홍(红)’이 합쳐진, 중국식 인플루언서를 뜻하는 말이에요. 인플루언서처럼 근사한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거리는 전보다 훨씬 활기가 넘치죠. 주말이면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요.”
상하이 드라마 아트 센터에서 쏟아져 나온 관객들과 길가 노천 테이블에서 아날로그 필름카메라를 만지는 청년들의 모습은 안푸루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의 풍경과 최신 유행이 기묘하게 섞여 있는 안푸루는 이제 상하이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우캉루와 안푸루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상하이의 진정한 힘을 목격했다. 묵직한 노스탤지어의 토대 위에 취향과 예술이란 세련된 감각을 정교하게 쌓아 올리는 능력이었다. 플라타너스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낡은 벽돌 위로 그림자를 드리울 때, 상하이의 헤리티지는 비로소 완성되고 있었다.


감각적인 여행자를 위한 우캉루와 안푸루의 스폿

낡은 창고를 개조한 뷰티 편집숍부터 셰프들의 단골 미식 레스토랑까지, 과거의 유산을 감각적으로 치환한 11개의 스폿.

로미오의 발코니 (Romeo’s Balcony)
우캉루 210번지, 지중해풍 스페인 양식의 저택 2층에 위치한 작은 원형 발코니를 지칭한다. 특별한 상업 공간은 아니지만, 발코니를 가득 메운 화사한 꽃과 고풍스러운 아치형 창문의 조화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명장면을 떠올리게 해 붙여진 별칭이다. 우캉루에서 가장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포인트로 입소문이 나면서, 이곳 아래는 늘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1923년에 지은 오래된 저택의 벽면을 타고 흐르는 담쟁이덩굴이 무척 아름다운 스폿이다.
주소 No. 210, Wukang Road

샤르트르 레스토랑 (Chartres Restaurant)
프랑스 조계지에서 정통 프렌치 요리를 즐기고 싶다면 샤르트르로 향하자. 우캉루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현지 맛집 앱에서 ‘일부러 찾아가야 할 양식당 2위’로 꼽힐 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조계지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갓 구운 바게트와 정통 어니언 수프,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테리어 역시 짙은 나무 톤과 앤티크한 소품으로 꾸며 파리의 노천카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리 다리를 오리 기름에 담가 익히는 콩피와 소고기 등심구이, 팥과 흑임자를 이용한 아이스크림 디저트도 추천한다.
주소 No. 855 Huashan Road
영업시간 11:00~22:00

쑹칭링 저택 (Soong Ching-ling’s Memorial Residence)
중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쑨원(孫文)의 부인으로, 평생 아동 복지와 여성 권익 신장에 앞장선 여성 정치가 쑹칭링(宋慶齡)이 1948년부터 1963년까지 거주했던 집이다. 약 5000㎡ 부지의 드넓은 저택은 1920년대 초 독일 선박 회사의 사택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쑹칭링이 실제로 사용하던 1950년대산 리무진과 서재, 그리고 국빈을 맞이했던 응접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상류층의 품격 있는 생활양식과 역사적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주소 No. 1843, Huaihai Middle Road
관람시간 09:00~17:00

우캉맨션 (Wukang Mansion)
상하이 최초의 플랫아이언 스타일 주거용 건물로, 상하이를 상징하는 강렬한 건물 중 하나이다. 1층엔 카페와 편집숍들이 들어섰고 2층부터는 지금까지도 아파트로 쓰인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중국 영화 산업의 황금기 시절에 자오단(趙丹), 친이(秦怡), 쑨다오린(孫道臨) 등 수많은 유명 배우와 예술가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 동안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박해를 받으며 이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건도 빈번해 당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다이빙대(The Diving Board)’라는 비극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소 No. 1850, Huaihai Middle Road
관람시간 외관 관람 상시(1층 상점가는 매장별 상이함)

서틴 데 마르조 (13DE MARZO)
상하이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의 상징 같은 브랜드로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건물 전체에 매달린 거대한 곰 인형은 물론, 매장 내부 곳곳에도 브랜드의 상징인 곰이 가득하다. 이곳의 진짜 인기 비결은 곰 인형을 탈착할 수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의류와 액세서리에 있다. 나사(NASA), 베어브릭(BE@RBRICK), 케어베어(Care Bears) 같은 글로벌 아이콘과 꾸준히 협업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중. 카페 메뉴 역시 특별하다. 커피 위에 정교한 곰 인형 모양의 얼음이나 초콜릿을 올린 ‘곰 라테’는 인증샷을 위해 줄을 서게 만든 메뉴다.
주소 No. 322, Anfu Road
영업시간 10:00~22:00

아폴리 이타 베이커리 (Apoli Ita Bakery)
안푸루 가로수길의 고소한 버터 향을 책임지는 로컬 베이커리다. 매장은 아담하지만 유럽 정통 조리법을 고수해 구워낸 빵 맛은 상당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아몬드 크루아상과 천연 발효종을 사용한 사워도가 시그너처 메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과 갓 구운 빵을 종이봉투에 담아 들고 가 길가 노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곁들여 먹는 로컬을 항상 마주칠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한 담백한 맛으로 매일 아침 단골들의 발길을 이끈다.
주소 No. 358, Anfu Road
영업시간 08:00~20:00

하메이 (Harmay)
‘창고형 뷰티 편집숍’이라는 파격적인 콘셉트로 안푸루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스테인리스스틸 선반과 노출 콘크리트, 산업용 조명으로 꾸민 내부는 실험실이나 거대한 공장 창고를 연상시킨다. 전 세계 럭셔리 뷰티 브랜드부터 니치 향수까지 수천 가지 제품을 판매하는데, 이곳의 핵심은 다양한 제품의 샘플(미니어처)을 저렴한 가격에 자유롭게 골라 담을 수 있다는 것. 주말에는 입장 대기가 필수인 만큼 시간을 넉넉히 잡고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주소 No. 322, Anfu Road
영업시간 10:00~23:00

데자뷔 리사이클 스토어 (Deja Vu Recycle Store)
1층부터 3층까지 층별로 도서, 의류,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감각적인 빈티지 매장이다. 과거 영화 배급사의 건물을 개조했는데, 청과물 상점 테마로 꾸민 서점에는 수천 권의 헌책이 장르별로 빼곡하게 꽂혀 있다. 새 상품처럼 깨끗하게 진열된 중고 의류 매장에는 명품을 비롯해 빈티지 리바이스나 아디다스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의 희귀한 아이템도 찾아볼 수 있다. 각 제품마다 QR코드가 붙어 있어 실시간 가격 확인이 가능하다. 둬좌위(多抓鱼)라는 중국어 매장명을 함께 사용한다.
주소 No. 300, Anfu Road
영업시간 10:00~22:00

퍼거슨 레인 (Ferguson Lane)
붉은 벽돌과 회색 석재 건물이 미로처럼 얽힌 중정형 복합문화공간이다. 우캉루의 옛 이름 ‘퍼거슨 로드’에서 따왔으며, 낡은 공장과 거주지를 재생해 현대적 미감을 입혔다.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설수록 갤러리, 고급 꽃집, 수입 식료품점, 프렌치 레스토랑이 조화롭게 배치된 입체적인 구조를 만날 수 있다. 상하이의 고유한 룽탕 문화가 상업적으로 가장 세련되게 변모한 사례로 꼽히며, 특히 옥상 테라스가 있는 매장들은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눈앞에서 마주하며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주소 No. 378, Wukang Road
영업시간 매장별 상이함

섬싱 다이닝 바 (Something Dining Bar)
퍼거슨 레인 상층부에 위치한 이곳은 뷰 하나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통유리창 너머로 우캉루를 상징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펼쳐진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감각적인 컨템퍼러리 요리를 선보인다. 특히 브런치 메뉴의 플레이팅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저녁에는 엄선한 와인 리스트와 함께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즐길 수 있어 젊은 로컬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주소 2nd Floor, No. 376, Wukang Road
영업시간 09:00~23:00

시추안 시티즌 (Sichuan Citizen)
1930년대 상하이의 화려한 사교 클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쓰촨(四川) 요리 전문점이다. 최근 한국의 정지선 셰프가 상하이에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단골 식당으로 소개하며 국내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예약 필수 코스가 됐다. 혀끝이 마비될 듯한 매콤함을 자랑하는 마파두부와 쓰촨식 고추 닭볶음인 라쯔지, 그리고 쫄깃한 식감의 쓰촨식 딤섬이 추천 메뉴다. 시그너처이자 정지선 셰프도 극찬한 ‘바질 마가리타’도 꼭 주문해보자. 신선한 생바질을 통째로 짓이겨 향을 극대화해 쓰촨 요리 특유의 얼얼한 매운맛(마라)을 부드럽게 잡아준다.
주소 2nd Floor, No. 378, Wukang Road
영업시간 11:00~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