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작가의 옷장에는 음악이 걸려 있다. 시작은 1995년 팻 메스니의 공연장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해외 뮤지션의 내한 공연을 자주 찾아다녔다. 팻 메스니가 월드 투어로 서울에 왔을 때도 공연장을 찾았고, 그곳에서 티셔츠 한 장을 샀다. 처음 구입한 뮤직 티셔츠였다.
“그때 티셔츠 가격이 3만원 정도였어요. 지금 물가로 치면 6만~7만원쯤 되는 돈인데, 당시 대학생에게는 꽤 큰 지출이었죠. 그렇다고 모셔두지는 않았어요. 해질 때까지 입었고, 결국 잠옷으로까지 활용했죠.”
그때부터 고수하고 있는 그의 원칙은 명확하다. 소장용이 아니라 직접 입는 옷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엄밀한 의미의 수집가라기보다 오랜 시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자연스럽게 컬렉션이 생긴 ‘자연 발생적 수집가’라고 부른다.
“2020년쯤 300여 벌이었던 뮤직 티셔츠가 이젠 200여 벌 정도로 줄었어요. 오래 입어 낡은 옷도 있고, 이사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옷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준 경우가 많아요. 저에게 맞지 않는 사이즈의 좋은 티셔츠를 마른 친구나 지인에게 선물하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죠.”

(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아끼면서도 자주 입는다”는 말은 티셔츠 수집가에게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그에게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밀리터리 그린 컬러의 지미 헨드릭스 티셔츠다. 구입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멋스럽다고 느끼고 자주 입는다. 오래된 옷을 아끼기보다 자주 입는다는 그의 컬렉팅 원칙을 잘 보여주는 티셔츠이기도 하다. 이 티셔츠를 보고 있으면 지미 헨드릭스의 곡 가운데 유독 ‘Little Wing’이 떠오른다고.
(우)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거의 매년 찾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형 레코드 숍 아메바 할리우드(Amoeba Hollywood)에서 지난해 가을 구입했다. 헤비메탈의 전설 블랙 사바스의 앨범 아트워크가 프린트된 티셔츠다. 2025년 여름 블랙 사바스의 보컬리스트이자 헤비메탈의 아이콘이었던 오지 오스본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밴드의 음악을 다시 듣는 시간도 늘었다. 강렬한 곡이 많은 블랙 사바스의 음악 가운데 최근 유독 오래 남는 곡은 에 수록된 ‘Changes’다.

(좌)레클리스 레코드(Reckless Records)
해외여행을 떠날 때면 레코드 숍 순례를 빼놓지 않는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파리, 도쿄, 오사카, 런던 등에서 음악 팬의 발길을 붙드는 레코드 숍을 꾸준히 찾아다녔다.몇 해 전부터는 뮤지션의 공식 머천다이즈뿐 아니라 각 레코드 숍이 자체 굿즈로 제작한 티셔츠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런던 소호의 레클리스 레코드는 방문할 때마다 재미있는 디자인의 티셔츠를 선보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구입한 이 선명한 파란색 티셔츠는 올여름 자주 꺼내 입었다.
(우)더 킬러스(The Killers)
음악 티셔츠 고르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옷이다. 미국 록 밴드 더 킬러스의 2008년 앨범 아트워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더 킬러스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아트워크가 마음에 들어 오랫동안 자주 입었다. 좋아하는 뮤지션뿐 아니라 디자인 자체가 음악 티셔츠를 사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즐거움을 처음 느끼게 된 옷이다.
티셔츠 한 장에서 시작하는 음악 이야기
그의 컬렉션이 흥미로운 이유는 옷의 개수보다 티셔츠마다 시간과 장소, 음악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출간한 그의 책 <음악을 입다>는 라디오헤드와 U2, 펫 숍 보이스, 노라 존스, 데이비드 보위, 지미 헨드릭스, 마빈 게이 등 다양한 뮤지션과 앨범,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티셔츠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음악 평론가가 아닌 제가 음악책을 쓰려면 특별한 방식이 필요했고, 그때 떠올린 것이 소장하던 티셔츠였어요. 그걸 중심으로 음악 이야기를 풀어낸 거죠. 2019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약 6개월 동안 작은 아이패드로 원고를 썼어요.”
백영훈 작가가 듣는 음악의 범위는 무척 넓다. 록과 팝, 재즈를 비롯해 펑크에서 아이돌 음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펑크 음악을 많이 듣는데, 들을수록 장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고 느낀다. 그에게 티셔츠는 음악을 기억하고 다시 찾아가게 만드는 물건이다.
“스트리밍 시대에도 LP와 CD처럼 수고를 들여야 만날 수 있는 음악의 물성을 좋아해요. 티셔츠 역시 손에 잡히는 형태로 음악을 남겨두는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화면 속에 있던 음악을 손으로 만지고 몸에 걸칠 수 있다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어떤 티셔츠는 오래전부터 좋아해온 음악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어떤 티셔츠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음악을 거꾸로 찾아가게 만들죠.”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는 데이비드 보위의 ‘Blackstar’ 티셔츠다. 그는 20대에 보위의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다. 데이비드 보위의 유작 음반인 를 계기로 이전 음악을 거꾸로 찾아 듣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 티셔츠를 만났다.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와 협업해 만든 스페셜 에디션이에요. 제가 평소 지키던 ‘티셔츠 한 장에 5만원 이상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깬 티셔츠이기도 하죠. 통관비까지 포함해 한 장에 약 20만원을 지불했고, 다른 색상도 함께 구입하면서 총액이 40만~50만원에 이르렀어요. 저에겐 파격적인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보위를 기리는 티셔츠에는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어요.”
반대로 더 킬러스 티셔츠는 광화문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단돈 1만원에 샀다. 당시 음반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1만원을 추가하면 원하는 티셔츠를 고를 수 있었고, 그는 더 킬러스의 티셔츠를 골랐다.
요즘도 그는 레코드 숍에서 음반과 티셔츠를 산다. 항상 둘을 세트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음악이 먼저고, 어느 날은 티셔츠가 먼저다. 음반 매대를 살피다 마음에 드는 뮤지션의 티셔츠를 발견하기도 하고, 티셔츠 한 장 때문에 잊고 있던 음악을 다시 찾아 듣기도 한다. 음악과 티셔츠를 연결하는 일도 그에게는 하나의 디깅이다.

(좌)시규어 로스(Sigur Rós)
2017년 7월, ‘지산 월드 락 페스티벌’에서 구입했다. 아이슬란드 출신 포스트 록 밴드 시규어 로스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사운드가 지갑을 열게 했다. 아트워크는 여느 록 밴드의 강렬한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네이비 블루 바탕에 실버 톤의 까마귀 실루엣이 새겨져 있고, 등 뒤에는 ‘2017 Jisan, Korea’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그때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공연의 표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우)닐 영(Neil Young)
어떤 음악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야 제대로 맛을 알게 된다. 그는 이런 음악을 소위 ‘어른의 음악’이라고 부르는데, 닐 영이 그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대표 음반 의 아트워크를 그대로 옮긴 티셔츠 역시 그런 인상과 맞닿아 있다. ‘샌드 베이지’라 불리는 거친 색감에서는 여러 풍파를 거친 뒤 마주하는 사막의 모래를 떠올린다고. 음악에서 받은 인상과 티셔츠의 색감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한 장이다.

(좌)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티셔츠 한 장에 5만원 이상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대표적인 예가 데이비드 보위의 ‘Blackstar’ 티셔츠다. 보위가 세상을 떠난 2016년, 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그의 마지막 앨범 를 기리며 선보인 스페셜 에디션이다. 당시 세 장을 구입하는 데 웬만한 브랜드 정장 한 벌 값에 가까운 돈을 썼다. 평소의 가격 원칙까지 깨뜨렸을 만큼 의미가 큰 티셔츠다. 지금도 이베이에 빈티지 제품 한 장이 56만원 넘는 가격에 올라와 있을 정도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격보다 보위의 마지막 앨범을 기억하게 하는 한 장이라는 점이다.
(우)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는 그의 음악 컬렉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밴드 중 하나다. 밴드 공식 홈페이지 스토어를 둘러보다 무작위로 티셔츠 두 장을 보내주는 ‘미스터리 박스(Mystery Box)’를 발견했고, 주저하지 않고 구입했다. 그중 한 장이 이 회색 티셔츠다. 핑크 플로이드의 상징과도 같은 프리즘 이미지 대신 밴드 이름만 간결하게 프린트되어 있다.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에서 오히려 매력을 느낀다고.
음악을 입고 도시를 기억하는 법
음악을 찾는 일은 자연스럽게 여행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도시를 찾으면 레코드 숍에 들러 음반을 뒤적이고, 벽과 선반에 놓인 티셔츠를 살핀다. 여행지에서 티셔츠를 고르는 일은 낯선 도시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백영훈은 뉴욕과 도쿄, 파리, 런던, 서울을 음악의 도시로 꼽는다. 디지털이나 아이돌 음악이 중심이 된 지금도 서울에는 훌륭한 레코드 숍이 남아 있고, 음악 관련 티셔츠를 접할 수 있는 환경도 잘 갖춰져 있다고 말한다. 특히 파리와 런던은 오랫동안 그의 취향을 형성해온 음악과 밀접하게 연결된 도시다.
“요즘에는 뮤지션의 공식 머천다이즈보다 레코드 숍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티셔츠가 더 눈에 들어올 때도 있어요. 2년 전 런던 소호의 레클리스 레코드에 갔을 때도 그곳에서 만든 티셔츠를 샀어요. 유명한 뮤지션의 얼굴이 들어간 티셔츠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죠. 그 티셔츠를 보면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보다 제가 그날 소호를 돌아다니다 레코드 숍에 들어갔던 순간이 먼저 떠오르거든요.”
그에게 티셔츠는 여행에서 만난 음악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물건이다. 레코드 숍을 찾는 일 역시 도시의 음악적 풍경을 만나는 방법이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음악을 듣고 음반을 뒤적이며,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티셔츠 한 장을 가져온다. 그렇게 그의 옷장에는 여러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가 음악을 기억하는 방식에는 늘 장소가 따라붙는다. 런던의 레코드 숍에서 산 티셔츠에는 소호를 걸었던 시간이 깃들어 있고 모스크바에서 탄 택시에서는 조지 마이클의 음악이 흘렀다. 파리의 차창 밖 풍경에는 우연히 재생된 오래된 한국 음악이 포개졌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입기 위해 티셔츠를 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티셔츠는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듣고 누구를 만났는지를 되돌려주는 작은 아카이브가 됐습니다. 음악이 먼저일 때도 있고 티셔츠가 먼저일 때도 있지만, 결국 티셔츠 한 장에는 음악과 그때의 시간이 함께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