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화가의 집



서울의 소란스러움이 닿지 않을 것 같은 평창동의 고즈넉한 언덕 위, 굳게 닫혀 있던 한 저택의 대문이 모두를 위해 열렸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 파리에서의 긴 유랑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1988년부터 30여 년간 머물렀던 자택이자 아틀리에다. 2026년 5월, 공공 문화 시설 ‘김창열 화가의 집’으로 다시 태어난 것. 1984년 김창열 화백이 우규승 건축가에게 직접 의뢰해 완성한 집으로, 2013년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설계를 맡았던 홍재승・최수연 건축가가 복원 작업을 이끌었다. 화백의 작품 세계와 흔적을 만나보는 여정은 지상 2층에서 시작된다. 마당을 거쳐 내부로 들어서면 1층의 기획전시실과 아카이브실에서 1970년대 재료 실험부터 <회귀> 연작, 1999년 판화 <눈(La Neige)>까지 화백의 예술적 궤적이 펼쳐진다. 지하 1·2층 작업실은 그 깊은 사유의 근원지다. 물방울 조각이 흩어진 책상과 손때 묻은 붓, 대형 작품용 이동 의자 등 화백의 마지막 손길이 닿았던 집기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생 물방울에 천착해온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재료와 매체의 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특히 프랑스의 습도 높은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종이 반죽 작업은 채광이 좋고 볕이 잘든 평창동에서 비로소 꽃을 피웠다고. 화백이 예술의 지평을 넓힌 평창동 아틀리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숨 쉬었던 인간 김창열의 온기를 느껴보자.
주소 서울시 종로구 평창7길 74
만해 한용운 심우장


불교에서 ‘소’는 참된 본성과 마음을 상징한다. 거친 소를 고삐 잡아 길들이듯,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수행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비유에서 유래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노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은 한자 풀이 그대로 ‘소를 찾는 집’, 곧 진리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양도성 성북동 구간, 북정마을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곳은 북악산의 기운을 안은 채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단아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3·1운동 직후 체포된 선생은 출소한 뒤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다. 그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성북동의 땅을 내어주고, 뜻을 함께하는 지인과 유지들이 도움을 보태어 소박한 보금자리를 짓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심우장은 햇빛을 잘 받기 위해 남향으로 짓는 일반적인 한옥의 원칙을 거슬러 북향으로 지어졌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등지기 위해서였다. 만해의 꼿꼿한 정신이 깃든 심우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그가 직접 심은 소나무와 향나무가 눈에 띈다. 그 기개만은 잠들지 않은 듯 여전히 곧게 뻗어 있고, 그 옆으로는 은행나무와 모과나무가 어우러져 옛 한옥의 정취를 더한다.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향하면 선생의 글씨와 연구 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가운뎃방에는 시집 <님의 침묵> 국문판과 영문판이 진열돼 있는데, 익숙한 시구를 소리 내어 읊조리다 보면 깊은 여운에 휩싸인다. 선생은 해방을 단 1년 앞둔 1944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가는 수행의 의미를 나지막이 되새기게 한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일중의 집 보현재


‘널리 어진 이를 기리고 머무는 집’이라는 뜻의 보현재(普賢齋)는 옛 한글 글씨를 예술적 서체로 부활시킨 대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말년을 보내며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공간이다. 선생은 1995년부터 2006년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옆으로는 보현봉이 우뚝 솟아 있고, 정면으로는 북악산 능선이 완만히 이어지는 길. 그 고즈넉한 풍경을 마주하며 보현재로 향하다 보면 선생이 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2021년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이 집은 ‘일중의 집 보현재’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문을 열었다. 전통 기와 선이 아름다운 2층 저택 앞에 다다르면 전통 한옥과 현대 서양 건축양식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문을 열고 1층에 들어서는 순간,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계절의 온기가 가득한 정원이 펼쳐진다. 봄의 매화, 여름의 백일홍, 가을의 들국화, 그리고 겨울의 곧은 사철까지, 마당은 사계절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선생의 작업실과 생활 공간을 보존한 1층에서는 생전의 기물을 마주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우성의 <월매도>, 고희동의 <괴석도>, 청나라 주당의 <석지도> 등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과 고서화가 한데 어우러져 공간에 멋을 자아낸다. 2층으로 오르면 북악산의 비경을 마주하고 있는 선생의 대표작과 조우하게 된다. 시조 <시엽산방팔영>부터 6m가 넘는 한지에 한시를 장엄하게 풀어낸 <한예 10수>까지, 일중 선생의 기백과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평창20길 46
박노수 미술관


서촌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 살던 한국 근현대 예술의 결이 켜켜이 쌓인 동네다. 푸른 쪽빛을 수묵화에 담아낸 한국화 1세대 작가, 남정 박노수가 40년간 머물며 삶을 가꾸던 집도 이곳에 자리한다. 인왕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서촌 끝자락에서 마주하게 되는 박노수 미술관이 바로 그곳이다. 이 붉은 벽돌집의 역사는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디 순종효황후의 큰아버지이자 친일 반민족 행위자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지은 저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벽돌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 1층은 서양식 주택 형태를 띠고, 하얀 페인트로 마감한 2층은 일본식 목조 주택 특유의 창문과 그 아래 둥근 서까래 장식이 돋보인다. 내부로 들어서면 1층에는 온돌방과 마루, 응접실이 나란히 이어진다. 화백이 평생 수집한 고가구와 골동품, 1000여 점의 작품이 그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2층의 아담한 마루방을 지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관람객이 직접 칠한 그림이 디지털 산수화 가옥 풍경으로 살아나는 흥미로운 미디어 아트 체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이 이국적인 저택은 박노수 화백의 손길로 영감의 샘터로 자리 잡았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옥인1길 34
최만린 미술관



서울의 오래된 풍경과 원형이 남아 있는 정겨운 동네, 정릉. 평범한 주택 사이 빨간색 벽돌이 촘촘히 쌓인 양옥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바로 현대 추상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최만린 작가의 집이다. 오늘날 최만린 미술관으로 불리는, 뜻깊은 ‘하우스 뮤지엄’인 셈이다. 예술은 별게 아니라고 했던가. 농부가 곡식을 거두듯 예술가는 마음의 양식을 키울 뿐이라던 최만린 작가의 철학이 이곳에 그대로 스며 있다. 성북구에 뿌리내리고 살던 그가 1970년에 지어진 이 집을 매입한 건 1988년. 작가는 2018년 성북구가 매입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미술관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건물 외관과 골조를 훼손 없이 보존한 덕분에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복층 구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특히 1층과 2층을 잇는 나무 계단과 나무 천장이 인상적인데, 그 앞에 정갈하게 놓인 추상 조각들은 오랜 시간 이 공간에 머문 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시대순으로 펼쳐진 조각의 변천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통유리창 너머 정원에 자리한 조각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의 대표작 <0> 시리즈 중 두 점과 생명성을 표현한 <태> <맥> 그리고 <점> 시리즈의 작품들이다. 작품뿐 아니라 작가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작업 도구들은 보다 생생한 전율을 전한다. 2층에서는 영상 자료와 함께 작품 활동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해 놓은 최만린 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솔샘로7길 23